서울 뚝도시장 두부장수 유기신씨
“내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지 않았으면 편히 눈을 못 감을 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허.”
‘송박(朴)영신’의 충격으로 어수선한 세밑, 한해를 뜻깊게 마무리하는 보기 드문 주인공이 있다. 서울 자양동 뚝도시장에서 40년 넘게 반찬장사를 하고 있는 유기신(70씨다. 그는 중학교를 중퇴한 이래 한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쉰살 중년 문턱에 들어선 1996년 작성했던 ‘버킷 리스트’의 첫번째 소원을 20년 만에 스스로 달성했다. 바로 자서전을 써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은 편집 형식이 독특하다. 앞부분엔 글쓰기 강사의 교정을 거친 표준어본을, 뒷부분엔 그만의 어법대로 써낸 날짜별 ‘초고’를 그대로 붙여놓았다.
<유기신 자서전, 푸른 하늘 푸른 바다>(표지). 제목은 그가 2009년에 쓴 시의 제목에서 따왔다. 첫 저서 출판기념회를 하루 앞둔 28일, 그를 도와온 강사 김미경씨와 함께 뚝도시장 골목에서 저자 유씨를 만났다.
중2 그만두고 무작정 나홀로 상경
반찬장사 등 50여 가지 직업 40여년
“한많은 일생 어머니 소원 대신 정리”
‘버킷 리스트’ 20년만에 자서전 써내
“판소리 운율 살아있는 우리 민중사”
글쓰기 강사·수강생들 일제히 ‘감동’
“가정 형편 탓에 공부를 맘껏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서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장사에 배달에 돌아다니는 일을 하면서도 신문을 4가지나 봤어요. 책 소개 기사를 꼼꼼히 살펴서 베스트셀러나 추천 도서도 나름대로 챙겨서 읽었고요. 물론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열독하고 있죠. 얼마 전에 새 주주 모금운동에도 동참했네요.”
애초 버킷 리스트도 신문에서 보고 메모해둔 그는 2007년 회갑 기념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여행을 다녀온 것이 첫번째 리스트 ‘실천’이었다. 자서전 쓰기는 3년 전 어머니를 여읜 뒤부터 마음속으로 준비를 해왔다.
“사실 자서전은 어머니 소원이었어요. 일찍이 전남 영광 불갑산 자락의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라 언문과 일어도 깨친 어머니는 노름에 미쳐 가정을 내팽개친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삯바느질에 반찬장사에 홀로 두 아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다 가셨어요. 그 한 많은 일생을 남겨두고 싶어 하셨는데….”
마침내 올봄 그는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한겨레시니어직능클럽에서 진행하는 `보통사람들의 자서전 쓰기' 강좌에 신청했다. 서울대 출신 박사를 포함한 11명의 수강 동기 가운데 그는 거의 유일한 ‘비지식인’ 출신이었다.
“지난 3월 첫 강좌에서 유 선생님을 만났을 때 솔직히 ‘허걱’이었다. ‘컴퓨터를 한번도 써본 적 없다?’, ‘이메일도 없다?’, ‘핸드폰도 안 쓴다?’, ‘날마다 오토바이 몰고 두부 팔러 다닌다!’, ‘중학교도 중도에 그만뒀다!’. 수업 중에도 앞뒤 안 맞는 엉뚱한 질문을 해대는 통에 애를 먹었다.”
‘글 쓰는 서촌화가’로 알려진 김미경씨가 자서전 앞머리에 적은 유씨의 첫인상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반전의 주인공이 됐다. “한주씩 지날 때마다 컴퓨터를 사고, 핸드폰도 사고, 한글 타자도 하나씩 배워 나갔다. 몇 주 지나 카페에 글을 올리면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앞뒤 문맥도 전혀 맞지 않는 선생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한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6개월 예정 기간을 훌쩍 넘어 최근까지 단어 하나, 표현 한마디를 두고 유씨와 수없이 입씨름을 했다는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대로 솔직하고 자유롭게 써내는 글에 어느새 전통 판소리의 운율이 깃들어 있었다. 부모를 두고도 고아원을 전전하다 홀로 도둑열차를 타야 했던 무작정 상경기부터 첫사랑 ‘앵두’, 월남전 파병 전날 매춘부와 첫 경험, 중매결혼과 따뜻한 봄날 같은 신혼생활,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때 집짓기, 신문배달·퀵서비스 등등 50가지도 넘는 밑바닥 직업을 겪으며 살아온 그 자체가 민중사였다”며 ‘진짜 글쟁이 탄생기’를 소개했다.
실제로 유씨는 “기억을 더듬느라 밤잠을 설치고 새벽까지 쓰고 또 쓰느라 한때 몸무게가 8㎏이나 줄었다”면서 힘겨웠던 글쓰기 과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밤마다 혼자서 끙끙거리더니 당뇨 증세까지 보여서 걱정스러울 정도였어요.” 시어머니가 해온 반찬가게(신신상회)를 대물려 하고 있는 같은 고향 출신 아내 김귀님(67)씨는 “그 덕분에 팔자에 없는 ‘작가의 아내’가 될 모양”이라며 뿌듯해했다.
“칠십 평생 내 한몸 열심히 일해서 집 한채 남았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더 욕심낼 게 뭐 있나요. 이만하면 어머니 산소에 부끄럽지 않게 책을 올릴 만하지 않겠어요?” 유씨는 다시 두부배달 길에 나서며 다음 버킷 리스트는 ‘소설 쓰기’라고 수줍게 말했다.
29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는 유씨와 더불어 <윤용식 교수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아문 상처 위에 핀 꽃>, <이지형 자서전, 체화당의 꿈> 등 모두 3명의 동기생이 저자로 축하를 받았다. 김경애 기자ccandori@hani.co.kr
서울 자양동 뚝도시장에서 개조한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두부 납품을 다니는 유기신씨. 사진 김경애 기자
1971년 월남전에서 돌아와 서울 자양동 뚝도시장에서 야채장사를 시작한 유기신(오른쪽)씨는 시어머니가 하던 반찬가게를 대물려 하고 있는 부인 김귀님(왼쪽)씨와 두 아들, 며느리와 함께 터줏대감으로 정착해 살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12월2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한겨레시니어직능클럽의 ‘보통사람들의 자서전 쓰기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자서전학교 차성진 교장, 글쓰기 강사 김미경 화가, 저자 윤용식·유기신·이지형씨, 글쓰기 강사 임어진 동화작가·최현숙 작가, 시니어클럽 이수영 대표. 사진 한겨레시니어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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