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年一行(동년일행) 정희성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밖에 없던 南柱(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金明秀(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좋아하는 시를 하나 골라 달라고 했다.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나는 정희성 시인의 광팬이다. 당연히 정희성의 시여야 한다. 시인도 인정하는 결벽증 덕분에 등단 이후 시집을 한 손으로 꼽을 정도만 냈다. 시인은 반세기 동안 썼고, 나는 30년 동안 읽었다. 시를 골라내는 ‘탐색비용'이 적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사실 그럴 것도 없었다. 그의 시를 읽었던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읽고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나도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담배만 피우고” 싶었다. “아직도 돌을 들고/ 피를 흘리는 내 아들아”라고 외치는 시 ‘아버님 말씀’을 읽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또다른 시들을 보면서 나는 아프고 짠하고 따뜻했다. 그러나 나를 벌떡 일어서게 한 시는 오직 하나였으니, 그것이 바로 ‘동년일행’이다.
막상 고르고 나니 문제다. 왜 이 시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하니 막막해진다. 딱 열 줄뿐이고, 화려한 시적 비유도 없다. 장엄함도 없고, 선동과 호소도 없고, 서사성도 없다. 무채색 독백 같은, 에휴, 하는 한숨소리인데, 나는 읽자마자 자리를 고쳐 앉았고, 열번을 더 읽었다. 왜 그랬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읽는다.
정희성은 김남주, 김명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분단과 독재를 같이 정면돌파했다. 물론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방식은 달랐다. 김남주는 전사였고 앞장섰다. 정희성은 “한 시대의 불의와 맞서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사람들의 영혼”에 시를 바쳤다.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싸울 만큼 용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단정한 문장을 가진 아동문학가인 김명수 시인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오랜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온 김남주 시인은 자유로운 바깥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94년 2월에 세상을 떠난다. 이 시는 그 직후에 씌어졌다. 불꽃처럼 살아온 친구가 부조리한 세상에서나마 여유를 누려보길 바랐건만, 저리 훌쩍 가버리니, 남은 친구의 심사가 어찌할까. 황천 가는 길에 함께할 수도 없으니, 살 곳 못 되는 세상 안에서라도 떠나야겠다고 했을 터이다. 순수함과 순진함이 죄가 되는 세상에 그런 식이라도 저항해야, 남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조용하게 쉬 나서지 않던 친구는 아예 도시를 떠난다고 한다. 하나, 시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세속을 훌쩍 떠나 친구의 혼을 모셔둔 절에 가서 마당이라도 쓸고 싶지만, 그마저도 못한다. 한숨만 쏟아지니, 베란다에서 담배 하나 꺼내 물어본다. 그는 다시 “저문 강”으로 돌아와 “쭈그려 담배만” 피우고 있다.
저, 씁쓸하고 외로운 베란다의 풍경, 그건 낯설지 않은 나의 일상이다. 인간이 쓰러지고 싸워야 살 수 있는 저 밖의 세상을 보고, 목에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신발끈 묶고 광장으로 달려나가질 못한다. 대신, 저 좁고 어두운 베란다에 홀로 나가서, 담배 한대로 불끈한 주먹을 풀고 쾨쾨한 연기로 갈증난 목을 달랜다.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는 바깥의 어둠을 지켜본다. 여기저기서 베란다에서 반딧불이 부끄럽게 깜빡거린다. 반갑고도 쓸쓸하다.
이제 담배마저 끊었으니, 베란다도 하릴없다. 저기 광장에는 등산화 동여매고 수백개의 담배불로 만든 촛불을 들며 목이 터져라 뜨겁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베란다 문을 닫고 현관으로 간다. 신발장에 오래 간직해 둔 신발 한 켤레 꺼내 앞에 내려둔다. 나갈 시간이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차장 정책특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