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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도 이끼도 아닌 ‘땅의 옷’ 남극까지 찾아가 모은 까닭은”

등록 2017-02-01 19:10수정 2017-02-02 15:56

[한겨레 짬] 순천대 지의류연구센터장 허재선 교수

허재선 교수.
허재선 교수.

“불모지였던 국내 지의류 분류학 연구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지난 연말 희귀 지의류 표본 1만7892점을 국립수목원에 기증한 순천대 허재선(53·환경교육과) 교수는 뜻밖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흔히 정년을 맞은 교수나 은퇴를 앞둔 원로 학자가 평생 모은 연구자료를 내놓는 사례에 비춰보면 의아할 정도로 젊은 편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국내 지의류 연구 분야의 2대 권위자로 꼽히지만, 애초 전공분야는 아니었다. 1983년 서울대 농생물학과에 입학해 석사를 거쳐 93년 영국 랭카스터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의 전공은 ‘대기오염학’이다. “박사 논문의 주제가 ‘대기오염 지표생물의 개발’이었어요. 그 대표적인 지표생물이 지의류여서 관심을 갖게 됐지요.”

지난달초 방학을 맞아 잠시 순천에서 서울 나들이를 한 허 교수를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보길도단추지의.
보길도단추지의.

10여년 채집 지의류 표본 모두 기증
610여종 1만7천여점 국립수목원에
“자료도 연구자도 없던 불모지 개척”

‘대기오염학’ 박사논문 주제로 첫발
“오염 지표생물인 지의류 분류 시작”
국내 첫 연구센터 열고 후학도 배출

‘땅의 옷’이란 뜻의 지의류는 바위나 고목에 무늬처럼 얼룩덜룩 퍼져 있어 곰팡이나 이끼로 여기기 쉽지만 생물학에서는 ‘균류’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는 하얀 곰팡이(균류)와 녹색 조류(藻類)가 공생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독특한 복합생명체다. 식용으로나 원예용으로나 썩 쓰임새가 없어 특히 국내에서는 처음 발견된 이래 100여년 동안 독립된 연구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지구상에 1만4천~1만8천종이 보고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현재 788 분류군이 확인되고 있다.

2016년 12월 허재선(왼쪽) 교수가 이유미(오른쪽) 국립수목원장에게 지의류 표본을 기증하고 있다.
2016년 12월 허재선(왼쪽) 교수가 이유미(오른쪽) 국립수목원장에게 지의류 표본을 기증하고 있다.
“93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만해도 국내에 지의류 전문가가 거의 없었어요. 선행 연구 문헌도, 지도를 받을 선생님도 없어 일본을 오가며 3년간 기초를 배워야 했어요. 우선 우리 땅에 어떤 종류의 지의류가 얼마나 있는지부터 확인하려다보니 자연히 표본을 채취해 분류를 하게 된 거죠.”

98년 순천대에 자리잡은 뒤 취미처럼 시작했던 그의 지의류 공부는 2003년 연구재단에서 과제로 선정되면서 순천대에 지의류연구센터를 두고 ‘제2의 전공’ 단계로 접어들었다. 2006년부터는 산림청 산하 국립수목원과 공동 프로젝트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허 교수가 기증한 지의류 표본은 그때부터 10여 년간 채집해 온 것으로, 국내본 9297점과 국외본 8595점으로 구성돼 있다. 모두 610여종인 표본 중에는 '보길도단추지의'(Caloplaca bogilana Y. Joshi & Hur)처럼 그의 이름으로 신종 등록된 증거표본 53종도 들어 있다. 남·북극에서 그가 직접 채집한 380점도 희귀본이다. “남극 세종기지에는 4차례나 다녀왔죠.”

허 교수는 2015년말 국립수목원에서 발간한 국내 첫 <지의류 생태도감>(지오북 펴냄)에 대표 집필자로 참여했다. 모두 199종을 수록한 이 도감에는 우리 숲과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500여 장의 생태 사진을 현미경 확대 사진과 함께 실어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채집 기록과 표본, 기존의 문헌을 토대로 종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생육형·생식기관·착생기물을 아이콘과 표로 정리해 곁들여 생태현장 교재로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비록 비전공으로 시작했지만 도감까지 펴냈으니 나름 성과를 거둔 셈이지요. 센터에 수장고도 한계에 이른 데다 전공 분야에 좀 더 집중할 겸 표본을 정리해 수목원에 영구보존을 맡기기로 했어요.”

허 교수가 이처럼 기꺼이 연구 자산을 내놓을 수 있는 배경에는 든든한 제자들도 자리하고 있다. 순천대 지의류연구센터 출신으로 중국과학원에서 지의류 분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15년부터 국립수목원에서 근무중인 오순옥 연구원이 대표적이다. 도감 집필자로도 참여한 오 박사는 "10여년 전 초창기에는 지의류를 채취하면 일본에 가서 동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척박한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일본 연구자들이 찾아와 협업을 하고 중국에서도 유학을 올 만큼 연구체계를 갖췄다”며 허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이 새로운 학문의 물꼬를 튼 셈이라고 귀뜸했다.

도감 출간에 앞서 학계와 언론에서 더 주목을 받은 성과가 있었다. 2014년 3월 허 교수와 순천대 연구팀이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발표한 ‘지의류 곰팡이의 게놈 완전 해독’이 그것이다. 설악산에 자생하는 산호잔꽃지의를 비롯해 작고붉은열매지의, 방울주황단추지의 등 3종의 지의류에서 순수분리한 곰팡이의 게놈 지도를 해독해 미국 미생물학회지인 <게놈 어나운스먼트> 등 국제 학술지에 잇따라 실렸다.

“지의류는 극지방, 고산지대 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는, 천연 대사물질의 보고로 꼽힙니다. 천연염료·식용·약용·화장품 재료 등 산업적으로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고, 특히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항암·항균 작용을 하는 2차 대사산물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어요.”

허 교수는 앞으로 “산업화의 관건이 되는 대사물질의 대량 추출을 위해 유전공학적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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