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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서배스천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록 2017-02-16 19:36수정 2017-02-16 19:57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1만3500원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사진)가 영어로 발표한 첫 소설이다. 나보코프와 마찬가지로 1899년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서 교육 받은 작가 서배스천 나이트의 삶을 그 이복동생이 전기로 쓰는 과정을 다룬 <서배스천 나이트…>는 자전적 성격으로 우선 눈길을 끈다. “서배스천에게는 러시아어가 영어보다 더 쓰기 편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였다”는 대목은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버리고 영어로 창작을 해야 했던 나보코프 자신의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비둘기들(doves)과 백합들(lilies), 벨벳(velvet), 가운데의 부드러운 분홍빛 ‘v’와 당신의 혀가 구부러지며 길게 끌듯 ‘l’을 발음하는 식” 같은 구절이 연상시키는 <롤리타>의 도입부, “변함없이 그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삼류도 그 이하도 아니고 이류였다. 여기 이 책 좀 읽는 단계에서 가짜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예술적인 의미에서 이런 이류들이야말로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에서 보이는 엘리트주의는 나보코프의 체취를 진하게 풍긴다.

그러나 서배스천과 블라디미르의 유비는 여기까지. 이 소설에 나보코프 자신의 실존적·문학적 고민이 스며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곧 작품의 주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복동생이긴 하지만 장성해서는 서로 교류가 거의 없었던 화자는 서배스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새삼 그의 삶을 책으로 쓰기로 한다. 그에 앞서 서배스천의 비서였던 굿맨 씨가 쓴 전기가 나오고, 화자는 ‘굿맨 버전 서배스천 삶’이 왜곡한 사실과 진실을 바로잡는 한편 형의 유품에서 발견한 러시아어 편지 조각의 비밀을 추적해 나간다. 그 추적 끝에 확인한 사실은 서배스천에 대한 화자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예상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놀랍고 당혹스러운 반전이 소설 말미에 마련되어 있다. 서배스천이 요양원에서 러시아어 편지를 보내고 뒤이어 위독하다는 전보가 도착하자 화자는 우여곡절 끝에 요양원에 가서 그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으며 그 숨에 얹힌 서배스천의 ‘진실’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뒤늦게 알고 보니 서배스천은 하루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고 그가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환자는 엉뚱한 인물이었던 것. 그럼에도 그 무언의 ‘대화’는 화자의 삶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영혼은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일 뿐이며,” 실체와 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구성적이라는 것. 소설 마지막 문장들에는 이 소설의 주제이자 나보코프의 문학관과 통하는 이런 깨달음이 담겼다. “나는 서배스천이다, 혹은 서배스천이 나다, 아니면 우리 둘 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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