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창비·1만2000원
조해진의 소설집 <빛의 호위>에는 단편 아홉이 실렸는데, 모든 작품이 외국을 배경으로 삼거나 외국인을 등장시킨다. 외국이나 외국인의 비중이 가장 낮은 작품이 ‘작은 사람들의 노래’일 텐데, 여기서도 주인공인 조선소 용접공 균이 십년 가까이 후원하는 필리핀 소녀 앨리의 존재는 그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비추는 한줄기 빛으로 구실한다.
외국을 배경 삼거나 외국인을 등장시키는 소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해외 여행이 흔해지고 국내에서 외국인을 접할 기회도 많아졌다는 현실이 자연스럽게 소설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해진의 소설이 외부와 타자를 향해 도드라지게 열려 있는 편임은 분명하다.
세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를 낸 조해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했고 유대를 맺”(‘작가의 말’)은 이들의 이야기를 썼다. 사진 창비 제공
조해진 소설의 인물들은 정주(定住)가 보장하는 안정과 소속감 대신 떠돌이의 자유와 독립을 선호한다. 고독과 소외감에 시달릴 것임은 당연한 노릇인데, 그것이 오히려 단독자들 사이 연대와 소통의 근거가 된다는 역설이 소중하다. 표제작 ‘빛의 호위’에서 주인공은 헬게 한센이라는 외국인의 다큐멘터리 영화 <사람, 사람들>을 보고자 미국 뉴욕에 간다. 그에게 그 다큐멘터리에 관해 알려준 이는 이십여년 만에 재회한 초등학교 동창이자 사진작가인 권은. 권은은 가난하고 고독했던 초등학생 시절 주인공이 선물한 카메라가 계기가 되어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시리아 난민캠프로 취재를 갔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은 사재를 털어 마련한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다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유대계 미국인 퇴직 의사 노먼 마이어와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어머니 알마 마이어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 당시 오케스트라 동료인 장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이력이 있다. 피습을 받기 직전 노먼 마이어는 “그(=장)가 인생에서 한 가장 위대한 일을 내 삶에서 재현해주자는 다짐” 때문에 자신이 구호 활동에 나섰노라고 밝힌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국경과 민족을 넘어서는 인간애의 연쇄가 펼쳐진다. 장에게서 출발해 알마 마이어와 노먼 마이어를 거쳐 헬게 한센과 권은에게로, 그리고 다시 주인공 ‘나’에게로 이어지는 이 ‘빛의 호위’는 소설집 전체의 주제로 손색이 없다.
지난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산책자의 행복’에는 철학과 강사 출신이지만 개인파산을 거쳐 지금은 편의점 알바로 전락한 홍미영과 그를 라오슈(老師)라 부르는, 중국 유학생 메이린이 등장한다. 지금은 독일로 유학 간 메이린은 홍미영에게 메일을 보내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고 때로 조언도 구하지만, 가긍한 제 처지에 압도당한 홍미영은 답장을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국 유학 시절 한국인 친구 이선의 자살이 메이린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는데, 울먹이며 고통을 호소하는 메이린에게 홍미영이 한 조언은 이런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그 조언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다는 메이린의 메일로부터 다시 홍미영이 살아 있을 용기와 힘을 얻는다는 소설의 결말은 ‘빛의 호위’가 상호적이며 전염성 또한 강한 것임을 알게 한다.
동백림(베를린) 사건을 다룬 ‘동쪽 伯(백)의 숲’과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삼은 ‘사물과의 작별’처럼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 주목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미국에서 죽은 아버지와 언니의 흔적을 좇거나(‘번역의 시작’ ‘잘 가, 언니’), 입양 고아와 보육원 출신을 등장시킨 작품들도 있다(‘문주’ ‘작은 사람들의 노래’). 역사적 사건이든 개인의 아픔이든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는”(‘사물과의 작별’) 이들의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문주’)자는 것이 조해진 소설 주인공들의 태도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세계관이자 문학관일 터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