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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겨울공화국’ 시인이 헤쳐온 문학과 변혁의 격랑

등록 2017-02-23 19:49수정 2017-02-23 21:03

양성우 산문집 ‘지금 나에게도…’
‘노예수첩’ 필화사건과 옥중시집 등
“블랙리스트는 옛날로 돌아간 짓”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
양성우 지음/일송북·1만4800원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양성우 ‘겨울공화국’ 부분)

양성우(74) 시인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폭압을 겨울에 빗댄 이 시를 1975년 2월12일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서 직접 낭독했고, 그 일은 그의 삶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당시 광주중앙여고에 재직하며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시 쓰는 총각시인’은 그 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7년에는 장편시 ‘노예수첩’을 일본 잡지 <세카이>에 발표한 일로 투옥돼 2년 남짓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의 시집 <겨울공화국>(1977)과 <북치는 앉은뱅이>(1980)는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경찰은 수거한 시집을 한강변에 모아 놓고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양성우 시인이 신작 산문집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에서 ‘겨울공화국’과 ‘노예수첩’으로 인한 필화 사건을 비롯해 20~40대 삶의 격랑기(激浪期)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고교 2학년이던 1960년 4·19 시위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대학생들이 만든 ‘민족통일연구회’(민통연)의 하부 조직인 민통연 호남고등학생연맹 회장을 맡았다가 5·16 쿠데타 이튿날 1교시 수업시간에 무장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일은 앞으로 이어질 파란만장한 삶의 서막이었다. 학생 대상 문예지 <학원>에 시와 소설을 투고하는 문학소년이자 혁명가 체 게바라를 동경하는 열혈 청년이었던 그의 이후 삶은 문학과 변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굴러가게 된다.

“그곳은 처음부터 문학 언어와 법률 언어의 충돌과 함께, 문학은 정치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검찰의 틀에 박힌 법리에 맞서서 그것을 부정하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의 진술이 거세게 부딪치는 논쟁의 현장이었다. (…) 어쩌면 그곳은 마치 나를 벌주려는 법정이 아니라 현대문학 세미나장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전적 산문집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를 내고 22일 낮 기자들과 만난 양성우 시인. “돌아보면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었고 실패한 삶이라 할 수도 있지만, 뒤에 오는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책으로 냈다.”
자전적 산문집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를 내고 22일 낮 기자들과 만난 양성우 시인. “돌아보면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었고 실패한 삶이라 할 수도 있지만, 뒤에 오는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책으로 냈다.”
‘노예수첩 사건’ 재판정의 분위기를 전하는 글의 한 대목이다. 재판에 앞서 끌려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심문실 벽에는 이름도 어마무시한 ‘양성우 국제간첩단’ 조직표가 붙어 있었고, 문단 유명 인사들이 양성우를 ‘빨갱이 시인’이라 고발한 두툼한 원고 뭉치도 있었다. 당시 정보 당국이 그의 거처에서 압수해 왔다가 되돌려준 원고들은 면회 온 고은 시인 편에 바깥으로 내보내 시집 <겨울공화국>으로 나왔지만, 시집은 즉시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출간을 주도한 고은·조태일 두 시인은 구속되었다.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는 중에도 그의 시 창작은 멈추지 않았다. 운동 시간에 마당에서 주운 조그만 못 끝으로 성경의 여백에 눌러 쓴 시는 그에게 우호적인 교도관이 몰래 넣어 준 볼펜으로 누런 휴지에 옮겨 적어 교도관에게 건넸고 교도관은 그것을 모자 속에 감추어 밖으로 빼돌렸다. 옥중시집 <북치는 앉은뱅이>가 그렇게 나왔다.

87년 6월항쟁 이후 김대중의 영남지역 세력화를 위해 부산에 갔던 그는 지인들의 소개로 젊은 인권 변호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뒤 방문 취지를 알리자마자 그 변호사는 출입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백기완 지지자요! 당장 나가시오!” 그가 노무현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지금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전신 격인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양성우 시인은 책을 내고 22일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예술가들이란 기존 체제에 도전적이고 저항적이게 마련인데 정부를 비판한다고 지원을 안 하는 건 분명 나쁜 일”이라고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비판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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