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예담·1만3500원
이승우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사람은 주인공인 사랑의 숙주 또는 아바타가 되어 그 지시를 행동으로 옮긴다. 사랑과 사람의 관계가 유독 이 소설에서만 뒤집힌 게 아니라 실은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작가는 이런 생각을 주요 등장인물 네사람을 통해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
형배는 자신을 짝사랑하고 고백까지 했으나 제쪽에서 내키지 않아 물리쳤던 대학 후배 선희를 2년10개월 만에 우연히 마주쳐서는 단박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선희는 그 사이 실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상태. 삼각관계가 된 이 셋과 함께 형배의 고교 동창인 자유연애주의자 준호까지 네사람이 펼쳐 보이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색깔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사랑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사랑 그 자체인 것처럼, 이 소설에서 핵심은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다. 스토리를 재료 삼아 분석과 논평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 <사랑의 단상> 또는 알랭 드 보통이 사랑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두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떠오르게도 한다.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사랑하기’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이 기적의 주체는 사랑이다. 연인들은 사랑이 기적을 행하는 장소이다. 사랑이 사랑하게 한다.”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를 낸 작가 이승우. “보통 사람들의 사랑 경험에 대한 탐사 보고 삼아 쓴 소설”이라며 “사랑을 하고 난 이가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는 데에 유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사랑에 관한 이런 생각은, 생명체란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의 아이디어와도 연결된다. 그러나, 인물들이 사랑의 실험에 동원된 모르모트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들 각자의 고유성과 차이조차 아예 소거된 것은 아니다. 형배에게는 중학생 시절 사랑을 좇아 가출한 아버지가 남긴 상처가 있다. 그에게 사랑은 위험하고 나쁜 이미지를 수반한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랑에 빠질 것 같으면 한사코 그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사랑을 위한 아버지의 도피가 그 아들로 하여금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도록 조종했다”고 작가는 상황을 표현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천덕꾸러기로 자란 영석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가시를 세운 채 타인을 대하지만, 일단 사랑의 대상을 만나면 나무줄기를 감고 오르는 넝쿨식물처럼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끊임없이 만지고 확인하려 하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질투와 의심은 그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 그에게 선희가 끌린 것은 “그 남자의 약함, 보잘것없음” 때문이었다.
스토리보다는 그에 대한 분석적 논평이 주를 이루는 소설이긴 해도,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다. 형배와 영석 사이에서 갈등하는 선희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고, 자유연애주의자 준호는 ‘결혼해야 키스할 수 있다’는 강적을 만나 마침내 키스를 위해(?!)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선희의 선택이 어느 쪽일지, 준호의 결정은 과연 지속성과 효력이 있을지를 확인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거니와, 그들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는 적잖은 토론이 이어질 법하다.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의도를 넘어서는 표현들, 동기와 상관없는 결과들, 원문에서 달아나는 번역들이 삶에 신비를 더한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은 확신하는 사람의 확신보다 언제나 확고하다.”
입에 착착 감기는 잠언투 문장들은 읽는 맛을 돋운다. 1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평소 사랑에 관해 작성해 두었던 메모를 활용해 에세이 같은 소설을 써 보려 했다”며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차단한 소설이라서 어떻게 읽힐지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문 독서의 바탕이 있는 독자라면 고급 독서 체험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사랑을 대하는 몇 유형 인물 중 자신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맞추어 보고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