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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향과 타향 사이, 역사와 현재를 떠돌다

등록 2017-03-09 19:33수정 2017-03-09 20:57

여수
서효인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남해로 시작해서 다른 도시로 이야기는 밀려가고 밀려왔다.”(‘남해’ 부분)

이 시가 실린 서효인(사진)의 시집 <여수>에서는, 여수로 시작해서 다른 도시들로 이야기가 밀려가고 밀려온다. 여수, 불광동, 곡성, 이태원, 강릉, 부평, 양화진, 강화, 자유로, 목포, 인천, 진도…. “우리의 사면은 좁고, 바다를 넘지 않고 갈 수 있는 이국은 없다”(‘강화’)는 상황에 대한 항의이기라도 한 양, 시인은 휴전선과 바다에 갇힌 한반도 남쪽의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오고 또 간다. 시집에 실린 시 63편 가운데 50편이 특정한 지명을 제목으로 삼았고 나머지 작품도 ‘이모를 찾아서’ ‘친구를 찾아서’처럼 대부분 누군가를 찾아가는 여정 또는 모색을 다루었다.

구체적인 공간을 대상으로 삼은 시들은 그 공간에 새겨진 시간과 역사 또한 놓치지 않는다. 서효인의 시들에서 공간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시간축 위의 변화를 흡수하고 그에 적응하는, 유연한 생명체와도 같다. 가령 ‘구로’라는 시에서는 지난 80년대에 구로공단 의류공장 대우어패럴에 다녔던 이모의 파업 투쟁과 지금은 패션 아울렛 단지로 바뀐 가리봉동에서 옷을 고르는 ‘나’의 쇼핑이 30년 남짓한 시차를 넘어 포개진다. ‘서귀포’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비 오는 관광단지의 섹스 박물관에 들어간 어린 연인의 현재 이야기는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오버랩 되면서 묘한 긴장감을 낳는다.

‘장충체육관’은 어떤가. 70년대 이곳에서 펼쳐진 프로레슬링과 80년대 초 전두환 대통령을 탄생시킨 이른바 체육관 선거, 그리고 미국 유명 뮤지션의 공연이라는 당대의 상황이 동일한 공간을 배경으로 어지럽게 명멸한다.

“태평양을 건너온 보컬이 한국어로 인사한다. 안면이 없는 발음을 곧잘 알아듣는 집단지성. 노래를 따라 부르자 레슬러들이 야만적으로 엉킨다. 대통령이 손을 흔든다.”(‘장충체육관’ 부분)

시인이 떠도는 곳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여수’) 여수와 “정이 많은 할매가 교회 앞 버스 정류장까지 구부정하게 뛰어나와 도시락을 챙겨주던”(‘송정리’) 고향 송정리처럼 따뜻한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얼굴이 없고, 돌아가야 할 곳은 비석 같은 타향뿐”(‘무안’)에서 보듯 대체로는 낯설고 차가운 타향이기 십상이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여수’)던 여수와 얼굴 없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타향 사이에서 떠돈 기록이 이 시집이고 곧 우리네 삶인 것이리라.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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