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소설의 여성들은 자주 강간을 당한다. (…) 놀라운 사실은 폭력과 타락의 감수성이 배가되면서 그로테스크한 도시의 풍경이 섬세하게 드러나는 반면, 피해자인 여성 인물들은 철저하게 지워진다는 것이다.”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상찬을 들으며 4·19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문학사에 등재된 김승옥의 소설을 후배 여성 소설가가 ‘여혐’ 코드로 비판하고 나섰다. 젊은 여성 소설가 강화길은 <문예중앙> 봄호 리뷰 코너에 실은 글에서 ‘건’(乾)을 비롯한 김승옥의 주요 단편들에 보이는 여성 혐오 요소를 가차 없이 까발렸다. 같은 리뷰 코너에서 역시 여성 소설가 김엄지는 김동인의 두 단편 ‘광염소나타’와 ‘광화사’를, 남성 시인 송승언은 손창섭의 단편 ‘잉여인간’을 마찬가지로 ‘여혐 코드’로 비판했다. 지난해 성폭력 연쇄 고발을 거치며 문단 안팎에서 여성주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일부 남성 문인들의 반여성적 언행에 대한 지적을 넘어 남성 작가 작품의 성의식 왜곡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가 심화되는 양상이다.
1962년 <산문시대>에 발표한 ‘건’에서 주인공 소년은 윤희 누나를 강간하는 형들의 모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작가가 의도한 소설 내적 논리에서 이런 행위는 “탐욕과 이기적 폭력으로 이루어진 세속적인 남성들의 세계”(박혜경)에 들어서는 입사의식과도 같다. 그러나 폭력과 타락을 거치며 ‘성장’한다는 서사는 순전히 남성만의 몫일 뿐,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되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나 고려는 생략된다는 데에 후배 작가 강화길의 문제의식이 있다. 그는 ‘건’만이 아니라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생명연습’ 같은 김승옥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강간이 등장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타락의 구현은 문학적 성취다. 가해자들은 여성을 강간함으로 해서, 타락을 성취하면서 주인공으로 남는다. 결말의 아름다운 비극 앞에서 이전의 폭력은 지워져 버린다. 그들의 타락에는 짓밟힌 여성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 (…) 오직 남성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들이 감수성 혁명의 주체다.”
김동인의 단편 ‘광염소나타’에서 작곡가 백성수는 방화, 사체 모욕, 시간(屍姦),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작곡의 영감을 얻는다. 이와 관련해 음악비평가 케이(K)는 “천 년에 한번, 만 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 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라며 백성수의 행위를 예술을 구실로 옹호한다. ‘광화사’에서는 주인공 ‘여’의 공상을 빌려 화공 솔거가 소경 처녀에게 사기와 살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결과로 원하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김엄지는 김동인의 소설들에서 “광기에 대한 환상, 천재성을 변호하는 목소리 (…) 창작의 순간이 곧 범죄를 허용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며 “예술에 속해도 좋을 비윤리·범죄란 무엇일까”라는 회의적 질문으로 유미주의적 예술관을 비판한다.
송승언은 손창섭의 ‘잉여인간’에서 치과의사 친구 서만기의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간호사 인숙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하는 유부남 천봉우를 “사생활 침해에 근무 방해에 관음에 스토킹까지 (…) 잉여인간 이전에 준범죄자”라 규정한다. 그는 그런 봉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인숙에게 “제삼자인 내가 아무 때나 불쑥 들구 나설 수두 없으니까 좀 기다리란 말요”라 답하는 만기 역시 ‘중립충’이라는 인터넷 용어로 비판한다. 송승언은 손창섭의 또 다른 단편 ‘포말의 의지’ 중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여인과 인간의 자격을 구비치 못한 사내”라는 구절에서 보듯 “같은 잉여인간들이라도 불균형에 따라 표현되는 양상은 이렇게 다르다”며 소설 내용 이전에 작가 자신의 성평등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