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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진화심리학은 ‘여혐’의 과학적 호위병인가

등록 2017-03-16 19:41수정 2017-03-16 20:09

화성남-금성녀는 모두 유전자 차이?
대중서 만연한 ‘성 고정관념' 발원지
진화심리학의 ‘과학'을 검증한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마리 루티 지음, 김명주 옮김/동녁사이언스·1만8000원

‘먼 미래에는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토대 위에서 진행될 것이다.'

동물의 진화를 다뤘지만 인간에 대해 말하지 않은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 말미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살짝 덧붙였다. 지금의 혼란과 사태를 예견한 걸까? 1975년 에드워드 윌슨이 진화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다룬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이 출간되자, 학계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다. 스티븐 제이굴드 같은 진화학자는 물론 사회과학자와 페미니스트가 연대하여, 20세기 초 나치즘과 공모한 ‘사회적 다윈주의'와 ‘인종주의’ 악몽이 연상된다며 들고 일어났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윌슨의 후예들은 다방면으로 뻗어 나갔고 일부는 ‘진화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계 주류에 안착했다. 이번 논쟁은 ‘젠더’에 관한 것이다. 젠더 연구자인 마리 루티는 진화심리학이 성차별에 기초한 사이비 과학이라고 거칠게 공격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랑과 성 역할을 강의해 온 루티는 왜 연애교과서나 심리학 대중서들이 ‘화성 남자-금성 여자’판의 성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보기에 발원은 ‘과학으로 위장한’ 진화심리학이었다.

진화심리학의 주류는 ‘성은 곧 생식(번식)'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마리 루티는 말한다. 이를테면 보노보 집단에서 나타나는 번식 목적 외의 자유로운 성 행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오랑우탄의 경우 ‘강간' 행동이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이 때도 다른 영장류에게서 강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무시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사진은 교미를 하는 보노보 한 쌍. <한겨레> 자료사진
진화심리학의 주류는 ‘성은 곧 생식(번식)'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마리 루티는 말한다. 이를테면 보노보 집단에서 나타나는 번식 목적 외의 자유로운 성 행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오랑우탄의 경우 ‘강간' 행동이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이 때도 다른 영장류에게서 강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무시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사진은 교미를 하는 보노보 한 쌍. <한겨레> 자료사진
진화심리학에서 가장 잘 다루는 소재가 성과 생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 연구가 동물행동학을 거쳐 인간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남성의 정자는 거의 무한히 공급되지만, 여성의 난자는 평생 쓸 양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의 주류 이론은 남성들은 가능한 많은 연인을 원하는 반면, 여성들은 조건을 따지며 질 좋은 소수의 파트너를 선택한다는 기본 원리를 따른다. 남성은 구애하고 여성은 선택한다. 남성은 바람기가 많고 여성은 양질의 관계를 선호한다.

루티는 이러한 논증들이 성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연구자가 잘못된 가설을 세우고 억지로 꿰맞추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대중과학서로 나왔을 때는 비약과 단정이 심해진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를테면, 37개국 1만37명 인간을 대상으로 한 ‘짝짓기’ 연구를 총괄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연구 논문에서는 배우자 선호에 ‘성별이 미치는 효과’가 ‘문화가 미치는 효과’보다 적다고 해놓고서, 정작 대중과학서 <욕망의 진화>에서는 성 차이를 중요한 것처럼 다뤘다는 것이다. 성을 다루는 진화심리학은 과학의 탈을 쓴 문화적 신화일 뿐이라고 루티는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에드워드 윌슨 이후 사회생물학과 진화론 내부 그리고 사회과학계에서 벌어진 고전적인 논쟁의 연장선에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비판자들이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졌다고 반박한다. 두 명제를 가지고 쉽게 설명해보자. ‘남성은 여성보다 힘이 세다’, ‘고로 여성은 남성에게 지배받아도 괜찮다’. 앞의 명제는 ‘사실’의 기술이지만, 뒤의 명제는 ‘가치’를 다룬다. 우리는 곧잘 둘을 섞어버린다. ‘다윈주의 좌파’를 주장한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가 지적했듯, ‘인간은 동물보다 지적으로 진화했다, 고로 인간이 동물을 이용(혹은 착취)하는 건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사실에서 가치를 기계적으로 도출한 오류다. 인간이 동물보다 힘이 세다고 해서, 동물에 대한 지배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세다고 해서 여성 지배가 정당화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의 역할은 사실의 기술인 전자까지이고, 윤리학과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후자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도, 그에 대한 비판자들도 종종 이 선을 넘나든다.

우리 사회는 사실을 판단할 때 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가중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루티는 “생물학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보다 ‘진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문화에서 이런 식의 논리(사실과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는 반박)는 아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진화심리학은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 모호한 분야”라고 덧붙인다. 아쉬운 점은 ‘사실의 생산 과정’에 대한 루티의 비판이 구체적이거나 풍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진리’보다는 ‘진리 효과’를 파고들었다.

또 하나, 왜 과학자들은 사회적 편견이 반영된 지식을 내놓는지 질문하는 고전적인 논쟁이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문화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인가? 아마 진실은 양 극단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희미한 진화심리학이 뚜렷한 과학으로 성장하려면, 이론의 생산 과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사회적 감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마리 루티의 작업은 의미가 깊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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