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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자기가 쓰고 자기가 웃는 성석제표 ‘웃음 폭탄’

등록 2017-06-15 19:43수정 2017-06-15 20:12

성석제 짧은소설집 세권 나와
‘어처구니’ ‘번쩍하는’에 신작도
아이러니와 유머, 능청과 해학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문학동네·각 권 1만3000원

입심 좋은 이야기꾼으로 알려진 성석제의 문학적 출발이 소설이 아닌 시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1986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을 받으며 등단해 1991년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내놓았다. 그의 1994년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는 시에서 소설로 건너가는 과도기에 놓인 전설적인 책이다. 산문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고 짧은 소설 같기도 하지만 그 셋 중 어느 하나에도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 이 기묘한 글 뭉텅이를 가리켜 그 자신은 “내게 들어 있는 산문, 산문성을 모조리 토해내” 시만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써 본 것이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의 산문적 자질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듬해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소설가가 된 그의 그 뒤 행보는 수십권에 이르는 장편과 단편집, 산문집 등을 통해 확인하는 바와 같다. 장르 불문하고 성석제의 글들이 의표를 찌르는 아이러니와 유머, 능청과 해학을 큰 특징으로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특히 ‘짧은소설’들에서 그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짧은’을 관형어로 쓰는 ‘짧은 소설’이 아닌, 별도의 장르로서 ‘짧은소설’이란 콩트나 장편(掌篇)으로도 불리는, 원고지 20~30장에서 짧게는 달랑 한 글자짜리(!)까지 짧은 분량으로 된 압축적인 이야기를 가리킨다. 산문 작가 성석제의 출생 신고와도 같은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그리고 <재미나는 인생>(1997)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을 한데 묶은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2007)과 <인간적이다>(2010)의 일부 원고에다 그 뒤 쓴 최근작을 보태 엮은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은 성석제표 짧은소설의 알짬을 담은 선집이다.

‘짧은소설’을 모은 책 세권을 한꺼번에 낸 성석제. “글로 이야기할 수 있어 영예로웠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존재, 관계, 시간 들이 참으로, 진심으로 고맙다”(<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작가의 말’)고 썼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짧은소설’을 모은 책 세권을 한꺼번에 낸 성석제. “글로 이야기할 수 있어 영예로웠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존재, 관계, 시간 들이 참으로, 진심으로 고맙다”(<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작가의 말’)고 썼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어처구니…>의 맨앞에 실린 두 글 ‘웃음소리’와 ‘비명’은 성석제라는 독특한 산문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처럼 읽힌다. 한국 소설이 웃음소리와 비명소리를 묘사하는 데 인색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만화에서 확인한 웃음소리와 비명을 수집해 놓은 글들인데, 나름 진지한 의도와 논문처럼 엄숙한 체계가 희극적인 내용과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아이러니의 효과가 절묘하다. “끄으윽(임종시 숨이 넘어가는 소리. 이승에 미련이 많은 사람의 비명)”, “끅(임종시 숨이 넘어가는 소리. 이승에 미련이 적은 사람의 비명)”, “우욱(고통을 참으며 죽어가는 자의 비명)”, “힉(놀라 죽을 때의 비명)” 같은 설명을 읽다 보면 웃음을 깨무는 한편 기묘한 정확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랑하는…>에 실린 새 원고 ‘바보들의 비밀결사’를 보자. 문화예술계 모임 ‘바보회’ 얘기인데, 입회 규정이 나름 까다롭다. “기존 회원들 앞에서 일생일대의 바보짓을 고백하고 과반수의 회원들이 그를 평가해서 ‘진짜 바보스럽다’라고 인정해” 주어야 했던 것. “또렷한 눈빛과 재빠르고 재치 있는 언행으로 알려진 시인 S(에스)”며 “유명 건축가 J(제이)”, 그가 비 새는 집을 설계한 “소설가 H(에이치)” 등 누군지 짐작할 만한 이들이 등장해서 바보짓 경연을 펼치는 이야기가 재미지다. <…어처구니…>에 실린 글 ‘무위론자’에는 술자리에서 세속적인 자랑을 늘어놓는 이를 향해 “그라믄 머하노”라는 한마디를 툭 던짐으로써 상대를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도 등장한다. “대한민국 육군 7사단 26연대 3대대 2중대 1소대 3분대 9번. 그는 ‘아홉’이라는 말을 웃음소리로 바꾼 최초의 군인이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는, <번쩍하는…>에 실린 ‘번호’라는 글을 읽으면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쓰고 내가 읽고 내가 웃는다는 건 실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게 재미있어서 나는 가끔 내가 쓴 걸 읽어본다. 읽다보면 내가 빠진다. 누가 이렇게 웃기는 소설을 써서 나를 감득하게 하는가. 바로 나다. 그 소설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썼는가를 모르는 나다.”

역시 <번쩍하는…>에 실린 글 ‘우렁각시에게’에 나오는 이 대목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쓴 사람 자신이 읽으면서 웃는 글이 여기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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