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트라우마-한국 사회 집단불안의 기원을 찾아서
유선영 지음/푸른역사·2만원
“사회 모든 부문에 침투한 권위주의, 부정과 부패, 국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한 인생의 성공이 물질로 환전되는 물질주의, 경쟁 위주의 사교육, 성형 한국의 외모주의, ‘갑질’이 만연한 폭력과 착취의 아비투스.”
오랜 시간 일제 식민지 시기를 연구해온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인문한국(HK) 교수가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열거한 오늘날의 한국적 현상, 한국인들 삶을 특징짓는 양상들이다. 어둡고 부정적인 이런 양상들은 개별적으로는 다른 사회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지만, “이것들이 동시적으로 결착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물고 들어오는 양상은 한국적”이라고 유 교수는 진단한다. 왜 한국 사회가 유독 그러한가?
지은이는 먼저 한국의 고속·압축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힘과 권력, 성공, 물질을 향한 한국 사회의 무제한적 욕망과 얽혀 있으며 극심한 집단적 불안심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본다. 그 불안의 근원은 존재 기반, 즉 생명 유지와 먹고사는 생존 기반 불안정성에 기인하며 이는 피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집단체험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세기말의 모욕과 위기 직후 식민지배의 시간은 한국 역사의 심연이다. (…) 식민지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재배치되어야 유지되는 체제이고 이 기본적인 사회관계 안에서 민족적 모욕과 수치, 폭력, 굴욕 또한 일상화되었다.”
1945년 8월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군중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의 강제와 억압, 착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유 교수는 식민-피식민 관계를 관통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근대성의 기계적 이분법이 초래한 질곡에도 주목한다. 사회진화론, 계몽주의, 이성주의, 문명 대 야만, 합리 대 비합리의 이분법으로 대표되는 서구 발원의 근대성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됐다. 서구 근대 문명은 “그것을 가져온 사람들을 경외케 했고 어찌해 볼 수 없는 힘의 격차를 자각하게 하면서 (피식민지인들이) 약자이고, 후진이며, 야만임을 스스로 자인케 했다. 일본은 그 근대성의 문명을 앞세우고 과시하면서 조선을 정복하고 식민화했다.” 유 교수는 “이 문제의식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했다.
모욕, 폭력, 불의, 차별, 억압, 착취와 소외 현실 속에서 피식민지인들 내면은 이성주의 문명을 인류 보편의 표준으로 삼아 이제까지의 자신들을 존재하게 한 역사, 전통을 비롯한 일체의 과거를 폄훼하고 부정하며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나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은 이를 복제해 자신들의 변절,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식민지 시기 연구들은 크게 수탈과 저항을 주된 요인으로 보는 민족주의론, 근대화 성취에 주목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성론으로 구분하는데, 유 교수가 주목한 것은 식민지 근대성론이다. 식민지 근대성론은 “문화주의의 인식론과 이론적 논점을 수용해 식민주의와 근대성이 부분적으로 모호하게, 파편적으로 교차하고 중첩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책은 이 식민지 근대성론을 토대로 그 시기의 사회변동 과정에서 자신들을 재구성해야 했던 개별 주체들이 “집합적으로 공유하게 된 감정과 감각들에 실체를 부여하고 역사화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유 교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 비근대 유색인종 사회가 서구 문명과 조우했을 때 발생하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파헤친 프란츠 파농의 작업을 끌어들인다.
식민주의와 근대주의의 트라우마는 비서구 식민지인들에게 열등감, 모욕, 수치 등 심리적 상흔과 함께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공, 명예, 권력과 세력,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대한 열망과 비교우위를 통한 나르시시즘의 공격성을 심어 놓았다. 유 교수는 식민지 시대의 그런 양상들을 신문·잡지·책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부정적 양상들은 그 복사판일 수 있다. 근대성의 주요 수입 통로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트라우마는 치유되지 못했다. 파농은 탈식민화는 피식민 경험의 주체들이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국이 부정하고 스스로 파괴했던, 식민주의의 폭력과 모욕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인간성을 복원할 때 비로소 완료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근대도 시작될 것이라는 유 교수는 ‘촛불혁명’에서 그 희망을 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