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운산 김관석 목사 평전’ 펴낸 김흥수 교수
“군사독재, 억압통치의 시대에도 인권·민주화·평화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여기가 그 중심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한국기독교회사가인 김흥수(66·사진) 목원대 명예교수가 쓴 <자유를 위한 투쟁-김관석 목사 평전>(대한기독교서회 펴냄)의 서문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바로 ‘그 중심지의 중심’에 김관석(1922~2002) 목사가 있었다. 2004년 기독교교회협 인권위원회 창립 30돌 기념행사 때 한국기독교회관의 기둥에 그 글을 새겼던 김상근 목사는 “운산은 그때, 거기 한가운데에 있던 한국의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큰 설계자요 큰 운전자”라고 발간사에 썼다.
“김관석은 1968년 4월부터 1980년 2월까지 12년 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일했다. 그의 나이 46살부터 58살까지의 시기였다. 그의 생애에서 그야말로 가장 벅차고 빛나는 시간이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억압통치에 저항했기에 벅찼으며, 새 시대를 향한 힘이 충일했기에 빛이 났다.”
김 교수는 그 시기가 김관석 개인사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전성기”였다고 했다.
기독교민주화운동 편찬위원회 의뢰로
국내외 사료 수집 5년 가까이 작업
운산 15주기 ‘자유를 위한 투쟁’ 출간 “유신 맞선 NCCK 총무 12년 전성기”
교회협의회 중심 한국기독교 ‘회심기’
대학원때 결심한 ‘교회사 정리’ 결실 김관석이 4년 임기의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세번 연임한 그 시기는 바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하고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영구집권을 꾀하다 비명에 간 시기와 겹친다. 때마침 세계교회협의회(WCC)도 현실 세계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과 맞서 싸우는 ‘하느님의 선교’로 세계 선교 방향을 정하고 “그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한국을 주목했다. 김관석은 총무로서 한국 사회 민주화·인권·노동권 투쟁을 선도하면서 권력의 광기를 해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현 총무인 김영주 목사는 “그 12년이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고 “한국 교회가 비로소 생명을 존중하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선교적 과제로 삼은” ‘회심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중심은 기독교회관의 작은 사무실에서 인권·민주화·평화운동에 나선 김관석 총무의 시대적 소명과 활동을 조명하는 데 있다.” 김 교수는 김관석의 총무 시절에 무게중심을 두되,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일한 16년과 80년 취임한 <기독교방송> 사장 8년을 합쳐 “한국의 대표적 에큐메니컬 기구들에서 일한” 36년간을 망라했다. 지난달 22일 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재단이 함께 마련한 김관석 15주기 추모 겸 평전 출판기념회에서도 그는 ‘평전이든 자서전이든 회고록이든 이제까지 운산의 일생을 하나로 종합한 책은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김관석 평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인 김상근 목사도 그에게 “1970~80년대 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활약상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며 “운산 개인사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교회사를 써달라”고 주문했다. 따라서 ‘김관석 평전’은 일대기를 관통하는 사회·역사적 배경까지 짚어야 했다. 김 교수는 한신대와 미국 베일러대 대학원에서 ‘교회와 국가 관계학’ 등을 공부한 뒤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한국종교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그는 “군사정권 시기 한 사람의 목회자인 김관석과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향한 싸움에 더 많이 주목해 실증적 역사서의 서술 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마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시절 <한국기독교의 역사>(전 3권) 가운데 1945년부터 최근까지를 다룬 3권 작업을 하면서 현대 한국교회사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번 평전 집필을 위해 유신에 저항하는 한국 교회를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독일 등 유럽지역 교회를 비롯해 미국·일본의 교회협의회(NCC)까지, 국내외 자료보관실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필라델피아 장로교 사료실 자료들은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너무 많아 아쉽게도 집필에 활용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미국 교회의 역할과 1960~70년대 한국 독재정권 시절 사료들은 국내보다 외국이 더 풍부할 정도다. 세계교회협의회에도 3·1운동과 그 이전의 105인 사건, 6·25와 70년대 이후 북한 기독교 관련 자료들까지 보관돼 있다. 국내에선 그런 자료들이 위험해 버리기도 했는데…, 일본 쪽으로 몰래 옮겨 보관했던 방대한 자료들은 2000년대 고 오재식 선생 등이 국내에 들여와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겼다. 주로 70년대 자료인데, 아직 분류가 덜 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김 교수는 4년 반 전쯤 집필 의뢰를 받아 3년 남짓 동안 나라 안팎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긴 했는데, 시간에 쫓겨 이번 평전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자신도 유신 초기부터 서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79년 10월 추방된 일본인 사와 마사히코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분이 추방 직전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고별 강연을 했어요. ‘교회와 국가, 교회와 정치 등에 관한 주제를 다룬 한국 책을 단 세 권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마저 다 번역서거나 설교집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대학원생으로서 도전해볼 의욕을 느꼈죠.” 그는 이번 작업에서 70~80년대 초 국내외 민주화운동권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이냐 통일운동이냐’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과 ‘용공논란’까지 부른 진보세력 내부 충돌 등을 새롭게 인식한 점도 성과로 들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운석 김관석 목사 15주기를 맞아 <자유를 위한 투쟁-김관석 목사 평전>을 써낸 김흥수 교수.
국내외 사료 수집 5년 가까이 작업
운산 15주기 ‘자유를 위한 투쟁’ 출간 “유신 맞선 NCCK 총무 12년 전성기”
교회협의회 중심 한국기독교 ‘회심기’
대학원때 결심한 ‘교회사 정리’ 결실 김관석이 4년 임기의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세번 연임한 그 시기는 바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하고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영구집권을 꾀하다 비명에 간 시기와 겹친다. 때마침 세계교회협의회(WCC)도 현실 세계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과 맞서 싸우는 ‘하느님의 선교’로 세계 선교 방향을 정하고 “그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한국을 주목했다. 김관석은 총무로서 한국 사회 민주화·인권·노동권 투쟁을 선도하면서 권력의 광기를 해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현 총무인 김영주 목사는 “그 12년이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고 “한국 교회가 비로소 생명을 존중하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선교적 과제로 삼은” ‘회심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중심은 기독교회관의 작은 사무실에서 인권·민주화·평화운동에 나선 김관석 총무의 시대적 소명과 활동을 조명하는 데 있다.” 김 교수는 김관석의 총무 시절에 무게중심을 두되,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일한 16년과 80년 취임한 <기독교방송> 사장 8년을 합쳐 “한국의 대표적 에큐메니컬 기구들에서 일한” 36년간을 망라했다. 지난달 22일 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재단이 함께 마련한 김관석 15주기 추모 겸 평전 출판기념회에서도 그는 ‘평전이든 자서전이든 회고록이든 이제까지 운산의 일생을 하나로 종합한 책은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김관석 평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인 김상근 목사도 그에게 “1970~80년대 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활약상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며 “운산 개인사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교회사를 써달라”고 주문했다. 따라서 ‘김관석 평전’은 일대기를 관통하는 사회·역사적 배경까지 짚어야 했다. 김 교수는 한신대와 미국 베일러대 대학원에서 ‘교회와 국가 관계학’ 등을 공부한 뒤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한국종교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그는 “군사정권 시기 한 사람의 목회자인 김관석과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향한 싸움에 더 많이 주목해 실증적 역사서의 서술 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마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시절 <한국기독교의 역사>(전 3권) 가운데 1945년부터 최근까지를 다룬 3권 작업을 하면서 현대 한국교회사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번 평전 집필을 위해 유신에 저항하는 한국 교회를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독일 등 유럽지역 교회를 비롯해 미국·일본의 교회협의회(NCC)까지, 국내외 자료보관실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필라델피아 장로교 사료실 자료들은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너무 많아 아쉽게도 집필에 활용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미국 교회의 역할과 1960~70년대 한국 독재정권 시절 사료들은 국내보다 외국이 더 풍부할 정도다. 세계교회협의회에도 3·1운동과 그 이전의 105인 사건, 6·25와 70년대 이후 북한 기독교 관련 자료들까지 보관돼 있다. 국내에선 그런 자료들이 위험해 버리기도 했는데…, 일본 쪽으로 몰래 옮겨 보관했던 방대한 자료들은 2000년대 고 오재식 선생 등이 국내에 들여와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겼다. 주로 70년대 자료인데, 아직 분류가 덜 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김 교수는 4년 반 전쯤 집필 의뢰를 받아 3년 남짓 동안 나라 안팎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긴 했는데, 시간에 쫓겨 이번 평전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자신도 유신 초기부터 서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79년 10월 추방된 일본인 사와 마사히코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분이 추방 직전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고별 강연을 했어요. ‘교회와 국가, 교회와 정치 등에 관한 주제를 다룬 한국 책을 단 세 권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마저 다 번역서거나 설교집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대학원생으로서 도전해볼 의욕을 느꼈죠.” 그는 이번 작업에서 70~80년대 초 국내외 민주화운동권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이냐 통일운동이냐’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과 ‘용공논란’까지 부른 진보세력 내부 충돌 등을 새롭게 인식한 점도 성과로 들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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