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선 장편 ‘난주’
세 권짜리 장편소설 <난주>(필맥)를 쓴 장필선(41)씨는 정식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작가다. 책 앞날개의 소개글과 작가 후기를 참조하면, 서울대 불문과 82학번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력은 소설 주인공 ‘난주’의 그것과 거의 흡사해 보인다. 말하자면 <난주>는 자전적인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주>를 자전적이라 할 때 그것이 작가 한 사람의 ‘자기 이야기’만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한때 ‘386 세대’로 불렸던 작가 동세대 사람들의 집단 자서전적 성격을 지닌다. 그만큼 전형적이라는 얘기다.
노동운동가로 변신하기 전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학 시절 이야기에서 난주는 당시의 학교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르주아적’ 예술 취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같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술적 열망이 컸던 주인공은 그러나 당연한 좌절과 각성을 거쳐 ‘평범한’ 투사로 거듭난다. 소설의 본론은 89년~92년 사이 변혁운동 내부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남한 내 변혁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격히 쇠락한 극적인 시기였다. 주인공 난주와 그가 사랑하는 남자 성진은 결국 변혁운동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그것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예술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러할 때 예술은 단지 예술만은 아닌 것이어서, 그것은 곧 당시 운동권이 소홀히 취급했던 인간과 인간성을 대리하는 가치라 할 법하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성진이 변혁운동 내부의 관료주의와 비인간적 성격에 대한 반성을 역설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기존 문단의 바깥에서 제출된 소설 <난주>는 기왕의 후일담 소설들이 흔히 빠지곤 했던 감상주의적 미화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된다. 변혁운동 내부의 모습을 핍진하게 묘사한 점 역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록과 평가에 치중하느라 소설적 짜임새는 떨어지는 느낌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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