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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관동군 사령관을 노리는 중국인 요리사와 조선 여인

등록 2017-10-12 20:02수정 2017-10-12 20:47

혼불문학상 수상작 장편 ‘칼과 혀’
1945년 만주국 수도 신경 무대 삼아
음식과 무기, 말과 사랑의 각축 다뤄
칼과 혀
권정현 지음/다산책방·1만4000원

일제 패망을 앞둔 1945년,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마주친다. 관동군 사령관인 일본인 야마다 오토조, 그를 암살하려는 중국인 요리사이자 비밀 자경단원 첸, 첸의 부인인 조선인 길순이 그들. 권정현의 장편 <칼과 혀>는 세 사람을 통해 한·중·일이 얽힌 현대사의 한 지점을 흥미롭게 되살린다.

제목 ‘칼과 혀’에서 칼이 전쟁 무기와 조리 도구를 함께 뜻한다면, 혀는 우선은 조리된 음식을 맛보는 신체 기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알다시피 혀에는 또다른 기능이 있다. 말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것이다. 칼이 뒷받침하는 권력을 언어로 실어 나르는 사령관의 혀, 그리고 사령관의 눈에 들어 그와 사랑을 나누는 길순의 혀는 그 다른 두 기능을 대변한다 하겠다.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 내가 진정으로 신을 느끼는 순간은 포화에 살이 찢긴 시체를 목격할 때가 아닌, 부지런히 뭔가를 먹는 그런 순간이다.”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겁쟁이로 알려진 실존 인물을 모델 삼은 사령관은 “요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탐한다. 첸은 자신의 요리 솜씨를 무기 삼아 그에게 접근하고 나아가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 도망쳐 나온 길순 역시 독립운동가인 오빠와 연락을 취하면서 사령관 암살 기회를 노린다. 그가 사령관과 사랑을 나누는 혀로 그를 죽이고자 할 때 그 혀는 칼의 성격을 아우르게 되는 셈이다.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권정현. “충북 청원 고향 마을의 씨족 사회를 배경 삼아 전근대와 근현대의 접점을 그린 대하소설을 필생의 작업으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권정현. “충북 청원 고향 마을의 씨족 사회를 배경 삼아 전근대와 근현대의 접점을 그린 대하소설을 필생의 작업으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렇듯 각자의 칼 또는 혀로 작게는 일신의 쾌락에서 크게는 조국과 민족의 대의를 추구하는 세 인물의 각축을, 작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려주는 방식으로 그린다. “죽음이 산 자의 운명을 결정하고, 이미 죽은 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잎담배 냄새를 풍기며 말 탄 헌병들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곳”이란 소설 무대인 만주에 대한 설명이거니와, 이렇듯 멋부린 문체는 이 소설의 장점이자 함정이기도 하다. 문체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장악력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때로는 그 장악이 피상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동료 자경단원과 함께 황궁 주변에서 체포된 첸이 자신은 요리사라고 주장하자 사령관은 그에게 까다로운 ‘시험 문제’를 낸다. 한가지 재료로, 어떤 양념도 쓰지 않고, 1분 안에 맛있는 요리를 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황궁 요리사로 채용하겠다는 것. 불가능해 보였던 이 시험을 통과한 첸이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암살자라는 본색을 드러내자 사령관은 그에게 다시 ‘게임’을 제안한다. “하루에 한 가지, 매일 다른 요리를 해서 바쳐야 한다”는 것. 첸의 요리가 <천일야화> 주인공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대응하는 형국이다. 음식에 독을 섞는 방식으로 암살을 기도한 첸에게 “멍청한 놈, 제 요리를 제 손으로 더럽히다니”라며 개탄하는 사령관이나, “죄의 대가를 치르고 싶습니다. (…) 상 위의 음식을 더럽힌 죄”라며 그에 화답하는 첸이나 죽임과 죽음의 절박함으로부터 비현실적인 거리를 두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내가 죽여야 하는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이 아니라 오빠라는 사내들인지도 몰라.”

“오빠와는 무관하게, 내 손으로 나는 사내들의 세계를 부수고 싶어.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장편소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정현씨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수상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첸이 무기가 아닌 음식으로 암살을 꾀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일본인 사령관만이 아니라 사내들의 세계 자체를 파괴 대상으로 삼겠다는 길순의 ‘페미니즘’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런 길순의 이념이 소설 안에 자연스럽고 충분히 녹아들었는가는 따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칼과 혀>는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 권정현은 2002년 <충청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나와 장편 <몽유도원>과 소설집 <굿바이 명왕성> <골목에 관한 어떤 오마주> 등을 냈다. 그는 11일 기자들과 만나 “가볍고 발칙한 소설보다는 무겁고, 읽고 나서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고 싶다”며 “사회를 움직이는 힘, 그 힘에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들, 힘에 기생하는 사람들과 그 힘을 견디는 민중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내 소설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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