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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위로가 아닌, 용기와 품위를

등록 2017-10-19 19:54수정 2017-10-19 20:37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2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민음사(2011)

늦여름 명동에서, 다리가 뒤틀린 중국인 여행자를 본 일이 있다. 청바지를 입은 젊은 아가씨였고 적어도 그 순간은 혼자였다. 내 친구와 나는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친구가 말했다. “저만큼 걷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혼자 노력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거야. 설사 그녀가 말해준다 해도.” 우리는 우리 곁을 걷는 사람들이 어떤 슬픔을 가졌는지, 어떻게 용기를 끌어올리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혹시, 알고 싶다고 생각해서 뒤돌아보면 이미 멀어져 가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우리의 슬픔은 어느 하루 동안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초기작 <창백한 언덕 풍경>이 슬픈 것은 실패 때문이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잘 해내고 싶었던 일의 실패,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힘을 쏟았을 일의 실패,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에게 최적의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좋은 부모가 되리라는 꿈의 실패다. 주인공의 딸은 영국 낯선 방에서 홀로 자살해버린다. 평생 헌신하려던 일이 실패로 끝나면 어떻게 살까? 어머니는 가끔 상상한다. 딸의 시신이 며칠간이나 방치되어 있었을까.

<위로받지 못한 자들>이 슬픈 것은 상실과 후회가 아무리 커도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혼란스럽게 불쑥불쑥 등장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옛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다시 예전처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 제목처럼 위로는 없다. 대부분의 위로는 찰나의 일이거나 빈말일 뿐이고 누군가 다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잘 위로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위로가 아니라 다른 것, 굳이 말하자면 용기와 품위를 말한다.

세 친구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장소설인 <나를 보내지 마>에서 성장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클론이다. 심장병이나 암에 걸린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배양된 클론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어디를 여행할 것인지 저마다 신나는 꿈을 꾸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미래는 하나다. 아무도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아무도 여행을 갈 수 없고 장기 기증을 몇 번이고 죽을 때까지 하다가 죽는 길 하나뿐. 이 작품에 클론의 시원한 탈출 이야기는 없다. 유일한 희망은 서로 사랑하는 두 클론은 기증이 몇 년간 연기된다는 소문 하나뿐이다. 그런데 둘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소문이 사실이기나 할까? 나와 친구는 몇 년에 걸쳐서 이 작품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일 때도 있었고 왜 상황을 더 낫게 바꾸는 선택을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일까가 주제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다른 생각도 든다. 기증을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로 받아들인 친구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간다. 기증수술로 이미 약해진 친구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부축하는 것, 서로 어깨를 끌어안는 것, 한때 서로에게 의미 있었던 것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것,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한 것, 아직 살아있는 친구를 위해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한 것. 그들은 진짜로 자신을 나누어 줄 줄 알았고 어둠 속에서 더 사랑할 줄 알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유한한 생명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 날, 지는 해를 배경으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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