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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혼몽한 백일몽으로 표현된 어린시절

등록 2017-11-16 19:32수정 2017-11-16 20:12

배수아 7년 만의 소설집 ‘뱀과 물’
“아름답고 어두운 어린시절 그려”
“애독자들, 반가우면서도 경계된다”

뱀과 물
배수아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성장통을 앓던 어린 시절, 종작없는 꿈을 꾸다 낮잠에서 깨어나 마주한 어스름녘 풍경. 배수아의 소설 독후감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배수아의 신작 소설집 <뱀과 물>에는 주로 어린이가 등장하고, 소설 속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한테도 잠과 꿈은 현실 못지않게 본질적인 삶의 일부를 이룬다. 수록된 일곱 단편 중 첫 작품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는 배수아 자신이 편역한 프란츠 카프카의 책 <꿈>의 역자 후기를 대신해서 쓴 것이다. 한여름 유원지에서 아버지를 잃고, 서커스단에서 사라지는 마술을 한다는 어머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주인공 소녀는 경찰의 도움으로 트럭을 타고 아버지가 있다는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가기로 한다. 살포시 잠이 들었던 자신을, 트럭이 왔다며 흔들어 깨운 경찰 관계자에게 주인공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제 꿈이 시작되는 건가요?” 배수아 소설을 읽는 일은 이 소녀와 함께 혼몽한 꿈의 세계에 입장하는 것과 같다.

소설집 <뱀과 물>을 낸 소설가 배수아. 그는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은 스토리가 있는데, 왜들 스토리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동 전시 ‘공동의 리듬, 공동의 몸’ 중 김온 작가의 리딩 퍼포먼스 ‘양떼를 치는 사람들’ 앞에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소설집 <뱀과 물>을 낸 소설가 배수아. 그는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은 스토리가 있는데, 왜들 스토리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동 전시 ‘공동의 리듬, 공동의 몸’ 중 김온 작가의 리딩 퍼포먼스 ‘양떼를 치는 사람들’ 앞에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그 꿈의 세계는 모호하지만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이루어졌다. 일곱살까지는 사내아이 행세를 하고 일곱살 생일을 기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자아이, 북쪽 나라에서 왕 또는 사령관 노릇을 한다는 사라진 아버지, “아이들의 정부(情婦)”이자 “노인들, 그리고 외로운 개들과 쥐의 연인이기도” 한 동네의 ‘미친년’, 도둑이 들어와 깨뜨렸거나 혹은 깨뜨리지 않은 낡은 주물 거울, 삼십수년 전 여행을 떠나 사라진 할머니의 여행가방을 들고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여행을 다니는 여자….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거듭 출몰하는 이런 이미지와 모티프 들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문장들과 함께 독특한 서사의 리듬감을 자아낸다.

“어린 시절이라니, 그런 건 없습니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1979’)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뱀과 물’)

소설집 <뱀과 물>을 낸 소설가 배수아. 그는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은 스토리가 있는데, 왜들 스토리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소설집 <뱀과 물>을 낸 소설가 배수아. 그는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은 스토리가 있는데, 왜들 스토리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유년기란 흔히 잃어버린 낙원에 견주어지지만, 배수아가 보는 유년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망상, 유령, 야수. 이런 것이 배수아 소설에서 유년기와 결부되는 이미지들이다. 배수아 소설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불행하다 할 수 있을까. 부모를 잃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넘나드는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자유와 해방, 열린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도둑 자매’라는 단편에는 원피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은 소녀가 한낮의 철봉에 양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매달림으로써 맨 하반신이 햇빛 아래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벌을 받고 있는 천사”를 연상시킨다는, 표지 사진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이 이미지가 소설집 <뱀과 물>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14일 오후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수아는 책 표지에 쓴, 벌거벗은 소녀의 흑백 사진이 “소설의 일부”라고 소개했다. 그는 “어린 시절은 아름다우면서 어둡다”고 했는데, “왔던 세계(=전생 또는 탄생 이전)와 지금 이 세계라는 두 세계에 걸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소설처럼 모호한 대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어린 시절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를 크게 좌우하며, 그래서 나에게는 어린 시절이 굉장히 소중한 글쓰기의 자산”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원하는 방식의 스토리를 쓰기 위해 나름 애를 썼어요.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나 자신도 읽고 싶은 글을 쓰려 하죠. 내 소설을 좋아한다는 독자를 만나면 당연히 기쁘지만 동시에 경계하게도 돼요. 그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게 내 글쓰기에 영향을 끼치는 게 싫으니까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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