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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조선 지탱한 언관들 공간 ‘창덕궁 대청’ 터에 안내문도 없어”

등록 2017-12-13 18:17수정 2017-12-13 21:07

[짬] 궁궐전문가 홍순민 교수

홍순민 교수
홍순민 교수
홍순민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궁궐 전문가’로 불린다. <우리 궁궐 이야기>(1999)를 내면서다. 이 책은 지금껏 5만권 이상 팔렸다. 강의 요청도 많아 1년에 20여차례 외부 강의를 한다.

하지만 궁궐 전문가란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다”고 했다. “제 궁극적 관심은 정치를 포함해 생활과 정신문화, 예술 등을 종합해 조선 시대 문화사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는 최근 18년 전에 낸 책을 전면 개작한 <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상·하편, 눌와)을 펴냈다. 그를 지난 4일 명지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조선 정치사를 전공한 홍 교수는 96년 서울대에서 궁궐의 역사를 다뤄 박사학위를 받았다. 궁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렇다. “궁궐을 모르면 조선 정치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어요. 왕궁은 국가경영 및 정치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실제 그가 펴낸 책의 미덕은 서울의 5개 궁궐 안 공간에 스민 사람과 사건의 흔적을 정밀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궁궐 구조물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조선 시대 왕들의 행적과 그 의미를 살피게 된다.

경복궁 함원전 뒤편 우물터. 홍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궁궐 공간 중 하나로 꼽은 곳이다. 사진 눌와 제공.
경복궁 함원전 뒤편 우물터. 홍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궁궐 공간 중 하나로 꼽은 곳이다. 사진 눌와 제공.

성군으로 추앙받는 정조와 세종을 예로 들었다. “저는 궁궐 영건(건축)의 관점에서 정조를 비판적으로 봅니다. 정조는 첫아들을 낳은 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 등성이에 세자의 공간인 중희당을 짓습니다. 지어선 안 될 곳에 무리를 한 것이죠.” 말을 이었다. “또 조부인 영조 상중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고 2층 주합루에 자신의 초상화(어진)를 봉안해 경배하도록 해요. 숙종이나 영조는 궁궐 밖에 보관했죠.” 정조의 이런 행위는 적대 세력에 위협받고 있는 왕의 처지를 반영한다고 했다. “권력 강화를 위해 그렇게 했죠. 그런 임금(정조)이 사라지니 바로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

그의 책에 세종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세종도 당대에 토목공사를 많이 했지만, 공사를 상왕인 태종이 주도했죠. 백성을 동원해 욕먹을 짓은 자신이 하고 아들인 세종에겐 사람을 모으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최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내
5만권 이상 팔린 전작 전면 개정
궁궐 구조물로 조선사 이해하기
“궁궐 공간 잘 활용한 왕은 숙종”

“박정희 이후 궁궐 활용론 강해
엠비때 창덕궁 ‘국무회의장’ 카페로”

정국을 주도할 여유와 힘이 있는 왕은 대규모 건축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절검은 중요한 가치죠. 실록을 보면 발이 너덜너덜해도 바꾸지 않는다고 왕이 자랑을 합니다. 정통성이 약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는 왕들이 건축에 집착합니다. 광해군이 그런 경우죠.”

실제 광해군은 재위 중에 인경궁(지금은 사라짐)과 경덕궁(경희궁) 신축에 나선다. 인왕산 기슭에 인경궁을 짓는 도중 경덕궁 터에 왕기가 있다는 술사 의견을 따라 경덕궁 공사를 새로 벌인 것이다.

창덕궁 선원전 옆 양지당 뒤편. 홍 교수는 따듯한 뒤란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진 눌와 제공
창덕궁 선원전 옆 양지당 뒤편. 홍 교수는 따듯한 뒤란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진 눌와 제공

숙종은 궁궐을 정치에 적극 활용한 왕이라고 했다. “숙종 이전엔 창덕·창경궁에 각각 궐내각사(행정 관청)를 두어 별개의 궁궐로 이용했어요. 그런데 숙종은 창경궁의 궐내각사를 없애 창덕궁으로 일원화하고 창경궁을 국정운영의 예비적 배후 공간으로 활용했죠. 당시엔 임금이 누구를 어디로 불러들이느냐가 중요했어요. 숙종은 언관 등의 눈에 띄지 않게 창경궁의 예측 못할 공간에 신하를 불러들이곤 했어요. 그 뒤엔 정국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죠.”

영조와 사도의 갈등을 두고는 영조가 창덕궁 대신 경희궁에 머문 탓도 있다고 했다. “영조가 경희궁을 좋아했어요. 창덕궁에 머문 사도와 너무 떨어져 있었죠. 부자의 소통 부재엔 이런 거리감이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궁궐을 볼 때는 “궁궐의 망가진 현상 이전의 원형을 그려보고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는 궁궐이 그만큼 많이 망가졌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일제는 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히 부정했어요. 경복궁 후원에 총독부 관저(현 청와대)를 지었고, 궁을 행사장이나 놀이터로 만들었죠.” 예를 하나 들었다. “창덕궁 인정전 옆에 빈청이 있었어요. 오늘날로 하면 국무위원 회의가 열리던 곳이죠. 일제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곳을 승용차나 마차 전시장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더니 이명박 정부 때는 카페로 변했어요.”

<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 표지
<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 표지

그는 ‘문화재 활용론’이 박정희 정부 이후 등장해 지금도 문화재 정책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 땐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어요. 박정희는 권력 이미지 강화를 위해 문화재를 불순하게 활용했어요. 70년대 중반에 시행한 수원 화성이나 한양도성 등 국방유적 정화사업이 그 예이죠. 유적들을 망가뜨렸지만 일반인에게 문화재가 중요하다는 인식은 심어줬지요.” 말을 이었다. “지금도 활용론에 집착합니다. 관광자원이나 이벤트 장소로 써서 뭔가 사람이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연의 가치를 주목하고 그걸 존중·보존하면서 후세에 물려주는 게 바람직합니다.”

책엔 ‘언관들의 회의실’이었던 창덕궁 대청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관원들이 왕을 만나러 대전에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조선이 500년 이상 장수 왕조가 된 데 기여를 한 언론과 기록의 중심 공간이 바로 대청이다. 지금 대청이 있던 곳을 가보면 휑한 공터다. 설명문도 없다. “답사 때 동궐도(창덕·창경궁 그림)를 보여주며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공간이 텅 비어 있으니 말해도 잘 그려지지 않아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궁궐 공간은 ‘경복궁 함원전 뒤편 우물터’와 ‘창덕궁 선원전 옆 양지당 뒤편’이다. “(전자는) 우물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옛 흔적을 느낄 수 있죠. 물을 길던 무수리들의 애달픈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곳이죠. (후자는) 따뜻한 뒤란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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