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서울 하늘 아래
장마리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서울셀렉션·1만4000원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무대 삼고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를 발표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전라도 어촌 출신 소녀 ‘빛나’가 불치병을 앓는 40대 여성 ‘살로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했다.
“빛나에게도 서울은 낯선 도시입니다. 그런데 빛나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살로메에게 들려주면서 사랑의 관계가 생겨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도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이죠. 제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가 ‘언젠가 서울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낙천적인 말이죠. 소설 제목은 그 말에서 가져왔습니다.”
내년 3월로 예정된 프랑스어판에 앞서 세계 최초로 나온 한국어판 출간에 맞추어 13일 방한한 르 클레지오는 14일 오후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풍부한 놀라운 도시”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14일 오후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빛나>에는 얼굴 없는 스토커로 인해 일상의 공포를 느끼는 빛나 자신의 이야기, 전쟁으로 북의 고향을 떠난 조씨와 비둘기 이야기, 신비로운 메신저 키티가 전해주는 쪽지를 통해 이웃 간 연대와 관계성을 회복하는 이야기, 버려진 아이 나오미와 그 아이를 품고 살아가는 한나가 또 다른 삶과 죽음을 마주하는 이야기, 아이돌 스타가 되지만 탐욕과 거짓말에 희생당하는 가수 나비 이야기 등이 나온다. 이야기들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어느 순간 서로 연결되어 서울과 한국의 초상을 그려 보인다. 소설 속의 이런 대목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190쪽)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14일 오후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소설은 프랑스 작가가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울의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신촌과 이대입구 골목길, 방배동 서래마을, 오류동, 홍대, 당산동, 과천 동물원, 청계천, 북한산, 남산, 한강 등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서울에 머물 때 택시보다는 버스와 지하철을 즐겨 탄다는 그는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여러 도시가 한데 모인 느낌”이라고 말했다. 소설 말미의 이런 대목은 프랑스 독자보다는 한국 독자에게 한결 친근하고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237쪽)
르 클레지오는 2001년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차 방한한 이래 여러차례 한국을 찾았으며 2007~2008년 1년간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2014년에는 제주 부속섬 우도의 해녀들에게 바치는 소설 <폭풍우>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또 다른 중편 ‘신원 불명의 여인’과 함께 묶여 지난 10월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간판 글씨를 해독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간담회에서 “한국어를 나날이 배워요”라고 정확한 한국어로 인사말을 한 그는 한국 여성 작가 한강과 김애란 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14일 오후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서울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가 떠올린 건 김애란 소설 <달려라, 아비>였습니다. 한강은 한국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 아래 보편적인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위대한 작가라 생각합니다.”
<빛나>는 다음주에 ‘Bitna: Under the Sky of Seoul’이라는 제목으로 영역 출간되는데, 번역은 한국문학 영어 번역자로 잘 알려진 안선재 교수가 맡았다. 안 교수는 이날 간담회에 동석해 “서로 다른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모여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며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죽음이 다루어지지만 문체가 매우 시적이고 서정적이어서 아름답게 읽힌다”고 말했다. <빛나>는 영역본과 프랑스어판에 이어 스페인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도 차례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