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프랑스 남부 툴루즈 거리에서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를 한 소방관이 지켜보고 있다. 툴루즈/AP 연합
2002 대선 극우파 약진
파시스트 정권 출현 위기감 고조
극우 포섭하려 우파 정권 더 우경화
평등 깃발 거둔 것이 근본적 뿌리
외국인 노동자 탄압하는 한국은 어떤가
포커스 3주 동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프랑스의 ‘소요사태’는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다. 프랑스 당국은 지난 17일 소요사태가 끝나고 치안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젠 꺼진 불씨를 추스르는 것만이 남았다는 듯, 프랑스는 뒷수습에 몰두하는 것 같다. 이 사건을 통하여 대도시에서 소외된 외곽 지역에 위치한 이민자들의 거주 공간 문제에서 실업문제, 거시적으로는 사회 통합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제기된 모든 문제가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분명 그 문제들은 사건과 관련이 있다. 1960년대부터 건설되었던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서의 신도시는 이른바 사회 통합의 객관적인 해법이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실제로 이민자들을 프랑스 사회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분하고 격리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거 공간 속에 갇히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곳은 작은 아프리카가 되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내의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실업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민 노동자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고, 그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격리 상태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소외된 자들을 기다리는 공간이었을 따름이다. 열악한 조건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민자들의 생활 조건은 극도로 악화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수많은 금지의 조항들을 위반하는 것뿐이다. 과연 이민자들은 궁극적으로 범죄자인가? 그들은 통합을 거부한 것인가? 프랑스가 시도한 것은 과연 통합이었는가? 이번 사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전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들을 살펴봐야 한다. 96년에 일어난 이른바 쌍-빠삐에(sans papiers 신분증이 없다는 뜻)라고 불리는 불법 체류 노동자들에 의한 성 베르나르 성당 점거사건과 2002년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그것이다. 90년대에 들어 이민 노동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된 후, 수많은 이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음으로써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를 떠나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모국을 떠나 프랑스에 기반을 닦았고, 그 자녀들은 프랑스의 속지주의에 따라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자식은 남아 있을 수 있으나 부모는 프랑스를 떠나야 하는 황당한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그들은 불법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그 노동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이 파리의 마침내 파리의 성 베르나르 성당을 점거하고 단식을 전개하며 그들의 지위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해주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온 프랑스를 흔들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연이어 정부의 비관용적 행태를 비난하며 이들의 합법적인 지위를 요구했으며 많은 대중들이 이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우파 정권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력은 농성을 해산시켰고, 그 중심인물들은 강제 추방되었다. 이후 이른바 ‘쌍-빠삐에 노동자’는 프랑스 대중 운동의 중심적 이슈가 된다. 그러나 그 운동의 성과를 가로채는 것은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제도권 좌파였다. 이민 노동자 추방 외친 극우파
사회당은 97년 의회 해산과 더불어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하여 내각을 장악하지만 합법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 노동자들에게 약속된 합법화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그리고 아주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와중에 2002년 대선은 다가왔고, 거품 경제에 의존할 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좌파는 낙마하였다. 이것은 충격이었다. 이민 노동자의 추방을 목 놓아 부르짖던 극우파 후보가 좌파 대신 결선 투표에 진출한 것이다. 프랑스는 공포에 휩싸인다. 당시 극우파에 반대하여 공화국 광장을 가득 메웠던 수십만의 시위 인파는 파시즘의 공포에 질려 잔뜩 움츠린 군중이었을 뿐이다. 결국 시라크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고 이제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 극우파를 지지한 18%가 절대 소수만은 아니기에 우파 정권은 극우파의 이해를 계산에 넣는 것이다. 경찰력은 강화되었고, 강력한 치안 유지를 선언한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갔다. 경찰은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외곽 도시에서 검문을 강화했고 이 무차별적인 검문에 걸린 이민자 2, 3세들은 합법적인 신분이 확인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경찰서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두 소년의 죽음이 찾아온다. 마침내 분노는 폭발하였다. 경찰에 쫓기고 차별을 감수하던 청년들이 선택한 수단은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방화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었다. 비난은 이어진다. “왜 그러한 수단을 선택하는가?” “폭력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청년들을 “인간쓰레기”라고 표현한 사르코지 내무 장관은 여전히 지지받는다. 그러나 이 청년들에게는 선택이 없다. 그들은 이웃집 아저씨가 불법 체류자로 강제 추방되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시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무시와 차별 그리고 경멸 속에서 그들은 철저히 ‘없는 존재’였다. 아무도 그 입장과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아픔이 심하면 소리치기 마련이다. 소리쳐도 소용없다면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다. 결국 정당성은 문제가 아니다. 방화는 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노하고 있음을 알리는 유일하고도 절망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불꽃은 더욱 서글프기만 하다. 프랑스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고향이다. 프랑스인들이 피를 흘려 얻어낸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도 항상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고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진하다. 프랑스는 그 그림자를 항상 직시하는 곳, 다시 말해 사회적 모순의 고발과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가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는 곳이었다. 그러한 프랑스이기에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 역시 일견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통의 이름으로 미화된 옛 기억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이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프랑스의 현재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대도시 외곽에 격리되어있던 감춰진 현실은 우울한 불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국가는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그 사회에 공헌하던 이민자들은 그 가치를 박탈당하고 언제든 추방 가능한 집단으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앞서 말한 96년 불법 체류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통합은 없었다. 아니, 통합의 시도조차 없었다. 프랑스 국가는 그들을 격리된 상태로 방치하는 것 이외에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가의 구체적인 정책은 전혀 그들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격리되었고 프랑스 국가는 그들을 그렇게 버려두었다. 그들은 필요 없는 존재로,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되었기에 결국 추방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사라져버린 ‘평등의 나라’ 평등의 나라 프랑스는 2002년 대선에서 드러난 파시즘의 공포와 함께 사라진 것 같다. 그 후 프랑스 국가는 극우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극우 파시즘의 지지 세력을 만족시켜왔다. 현 정권으로 충분한 일에 파시스트까지 나설 이유가 있겠는가? 극우의 성장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좌파 역시 침묵할 뿐이었다. 프랑스 정치권은 파시스트가 집권하는 망신을 당하기 전에 그 원인을 제거하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민 노동자라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거하는 것이고 이민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그들을 추방하는 것은 바로 극우 파시즘을 핑계 삼아 보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서용순/영남대 연구교수, 철학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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