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국문학은 페미니즘의 거센 물결 속에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친일문학상을 둘러싼 논란과 블랙리스트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치열했으며, 문학진흥기본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을 둘러싸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사이에 의견 대립이 빚어지기도 했다. 문학잡지들의 폐간이 이어졌고, 유난히 많은 문인들이 타계한 해이기도 했다. 2017년 문학계를 돌아보았다.
시론집 <여성, 시하다>를 낸 김혜순 시인.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문학상(당선작 '다른사람') 당선자 강화길 작가.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페미니즘의 거센 물결 지난해 10월 출간된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인기는 해를 넘기며 오히려 뜨거워졌다. 이 책을 낸 민음사는 출간 14개월 만에 50만부 판매를 넘어섰다는 자료를 이번주 초에 내놓았다. <82년생 김지영>이 선도한 페미니즘 물결은 다른 작가와 작품으로도 이어졌다. 박민정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 레즈비언 커플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김혜진 장편 <딸에 대하여>, 종말론적 상상력과 여성주의를 버무린 최진영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 등이 페미니즘 바람을 이어 갔다. 이혼을 전후한 여성들의 삶을 다룬 김숨 소설집 <당신의 신>, 여성들을 위협하는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고발하는 한편 여성들 내부의 오해와 갈등도 놓치지 않은 강화길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다른 사람>, 일제강점기 여성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현실 속 여성의 역할을 고민한 조선희 소설 <세 여자>, 그리고 가난과 편견을 상대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하는 싱글맘 전업 시인의 애환을 그린 신현림 시집 <반지하 앨리스>와 여성이 시를 쓰고 읽는다는 일이 지니는 의미를 천착한 김혜순 시인의 역저 <여성, 시하다> 등도 각자의 방식으로 페미니즘 문학의 현재를 기록했다. 페미니즘 소설 열풍의 진앙지라 할 조남주는 동료 여성 작가들과 함께 페미니즘 합동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로 바람을 이어 가기도 했다.
소설집 <뱀과 물>을 낸 소설가 배수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그리고 다른 여성 작가들 굳이 페미니즘의 틀에 가두지 않더라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눈에 뜨인 한해였다. 그동안 장편에 주력해 왔던 공지영이 오랜만에 자전적 색채가 짙은 소설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내놓았으며, 배수아도 소설집 <뱀과 물>을 통해 특유의 몽환적 매력을 과시했다. 세월호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 이후 생존과 희망의 가능성을 모색한 김애란 소설집 <바깥은 여름>, 외국과 외국인을 주로 등장시키면서 연대와 소통의 가치를 역설한 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 핵발전소와 비정규직 노동, 사이비 종교 같은 사회적 현안을 적극 끌어안은 최은미 장편 <아홉번째 파도>, 손보미의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장편 <디어 랄프 로렌> 등도 각자의 개성 속에 여성적 문제의식을 공유한 수작들이었다.
자전 <수인>을 낸 소설가 황석영.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설집 <국화 밑에서>를 낸 원로 소설가 최일남 선생.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소설 <유리>를 낸 박범신 작가.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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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 및 원로 작가들의 분발 현역 최고령 소설가라 할 최일남이 소설집 <국화 밑에서>로 여전한 입담과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역시 1930년대생 작가인 김주영도 장편 <뜻밖의 생>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황석영은 개인사와 시대사를 버무린 묵직한 자전 에세이 <수인>을 내놓았다. 지난해 성추행 논란 때문에 발간을 무기한 미루었던 박범신 소설 <유리>도 1년여의 유예 끝에 드디어 책으로 나왔다. 김원우는 구한말 척족이자 풍운아인 민영익을 주인공 삼은 역사소설 <운미회상록>에서 특유의 깐깐한 고증과 세태 비판을 선보였고, 김훈은 신작 장편 <공터에서>로 아버지 세대와 자기 세대 역사를 상대로 화해를 시도했다. 임철우는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 한국 현대사를 질곡으로 몰아넣은 악의 정체를 상대로 고통스러운 전투를 수행했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작가 최시한은 대학 정년퇴임을 앞두고 소설로 돌아와 21년 만의 연작소설집 <간사지 이야기>를 내놓았다. 이들보다 젊은 세대의 작품으로는 김영하 소설집 <오직 두 사람>과 김탁환의 세월호 주제 소설집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리고 독특한 형식 실험과 강렬한 현실 비판 메시지를 지닌 강병융 소설집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등이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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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들 상복이 없던 김정환은 지난해 낸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으로 올해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연말에 나온 그의 장시집 <소리 책력>은 특유의 관념과 장광설로 자신만의 예술철학을 설파한다. 이시영 시집 <하동>은 최소 언어와 민중 서사의 결합으로 득의의 경지를 열어 보였고, 박성우 시집 <웃는 연습>은 친근한 일상과 정겨운 이웃의 삶을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젊은 시인 서효인은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시집 <여수>에서 한반도 남쪽 곳곳을 발로 밟으며 공간과 인간의 내력을 더듬었다.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와 신용목의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신철규의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는 현실의 아픔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시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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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상 논란과 문학진흥기본계획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 춘원문학상 등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둘러싼 논란이 치열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를 중심으로 ‘친일문학상’ 폐지 요구가 거세게 일었고, 송경동 시인은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밝히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미당문학상 심사 경력을 문제삼는 이들이 있었고, 김혜순 시인은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을 둘러싼 논란 끝에 5·18문학상을 사양하기도 했다. 한국작가회의는 오랜 토론을 거쳐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에 대한 한국작가회의 입장’을 내놓았지만, “(친일문학상) 심사, 수상 등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모든 회원들에게 권고한다”는 결론이 미온적이라는 불만도 여전히 존재한다.
2016년 8월 제정된 문학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9일 제1차 문학진흥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14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세종도서로 통합되었으며 문학계의 대표적인 블랙리스트 집행 수단이 되었던 우수문학도서 사업을 이전으로 되돌리고, 우수문예지 발간 지원사업과 아르코 창작지원사업 역시 2014년 이전 수준으로 복원한다는 등의 구체안이 나왔지만, 국립한국문학관 건립 계획이 서울시의 반대에 부닥쳐 표류하는 모양새여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고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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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얼굴들, 안타까운 이별 지난해 <화산도> 출판기념회에 참석차 방한하려다 무산되었던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이 올해 신설된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 자격으로 방한했다. 촛불혁명에 의한 정권교체의 효과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시를 쓰지 않겠다고 공언한 안도현도 시로 돌아왔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었던 올해, 만으로 100살을 한 해 앞두고 시인 황금찬이 별세했다. 김종길 시인도 9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밖에도 정진규·조정권 시인과 소설가 박상륭·정미경, 국문학자 김용직·천이두 교수와 마광수 교수가 타계했다. 편집자 겸 아동문학평론가 김이구도 이승을 떠났다. 전통의 문학 계간지 <작가세계>와 <문예중앙>이 각각 봄호와 여름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