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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현실과 환상’ 넘나들기

등록 2005-11-24 20:20수정 2005-11-25 14:12

‘현실과 환상’ 넘나들기 김도연 소설 ‘십오야월’
‘현실과 환상’ 넘나들기 김도연 소설 ‘십오야월’
김도연 소설 <십오야월>

강원도 진부에서 농사 지으며 글쓰고 있는 김도연씨가 두 번째 소설집 <십오야월>(문학동네)을 묶어 냈다. 10편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은 작가 자신의 근황과 열망을 때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때론 에둘러서 표출한다.

<도망치다가 멈춰 뒤돌아보는 버릇이 있다>는 작품의 주인공 ‘총각’은 늙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고라니로부터 당근밭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밭주인’과 ‘밭주인의 아내’로 지칭되는 부모는 그에게 임무와 그에 딸린 권한을 줄 따름이고,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임무 수행의 필요상 그가 거느리고 있는 늙은 사냥개뿐이다. 그런데, 사냥개를 상대로 한 이 시인 지망생의 수작이 재미지다: “누가 이만한 지식으로 무장한 채 농사일이나 하겠니, 안 그래?” “근데 너… 시가 뭔지 알아?”(70쪽) 그렇잖아도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거나 알아들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사냥개를 상대로 한 그의 수작은 점입가경, 나름의 문학관을 피력하는 데로 나아간다: “워리야… 인간 세상엔 시란 게 있어. 시가 뭐냐고? 고독한 영혼이 부르는 노래지. 고독한 영혼이 뭐냐고? 삶의 희로애락에 화상을 입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만질 수는 없으나 쉽게 벗어나기도 힘든 무형의 꽃 같은 거야.”(73쪽)

당연한 얘기지만 사냥개와의 문학 토론은 허무한 독백으로 마무리되고, 출구를 찾지 못한 예술적 열망은 급기야 환상을 빚어내기에 이른다. 고라니와 함께 당근밭을 노리는 멧돼지 무리가 사냥개에게 산으로 들어와 늑대 노릇을 하라고 유혹하는가 하면, 들짐승들을 겨냥해 설치한 덫에 치인 주인공에게 고라니와 멧돼지가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이 작품뿐 아니라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환상은 주제 전달을 위한 핵심적인 장치로서 동원된다. 표제작에서는 역시 잡종 사냥개만을 데리고 산 속 외딴집에 혼자 사는 주인공의 집에 어느 날 저녁 낯선 손님들이 찾아든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조상들과 전에 기르던 가축들이다. 소설은 이 비현실적 존재들과 함께 보내는 하룻밤의 기록이다.

<흰 등대에 갇히다>라는 작품에서 시골 소읍 도서관에 출입하던 세 남녀가 우발적으로 사서를 살해하는 사건이라든가, <북호텔>에서 주인공 눈앞에 수시로 출몰하는 산양의 존재 역시 현실의 외피를 둘러쓴 환상이기는 마찬가지다. 김도연씨의 소설에서 현실과 환상은 그 경계를 획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밀하게 얽힌 채 갈마드는데, 현실과 환상의 그런 혼재와 동거야말로 작가 자신의 삶의 실상이자 그 문학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수록작 가운데 <동부전선 이상 없다>와 <불개> <검은 하늘을 이고 잠들다>는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채로운 소설들이다. 전방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이상한 전쟁 소동을 그린 <동부전선 이상 없다>와 잠수함을 타고 침투했다가 낙오된 북한 공작원들을 주인공 삼은 <불개>는 분단이라는 ‘낡은’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사북 폐광촌을 무대로 펼쳐지는 <검은 하늘을 이고 잠들다>는 특히 흥미롭다. 알코올 중독자 또는 불구자가 되어 노숙을 일삼는 전직 광부들이 ‘사북 전직 노동자 동맹’(사노맹)을 결성해 자본과 공권력을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는 설정부터가 발랄하다. “부패하고 이기적인 자본주의의 심장을 향해 정의의 폭탄을 투척하려”(290쪽) 한다는 출사표라든가, 그들이 거창하게 의미 부여를 하지만 실은 소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전과에 지나지 않는 싸움의 결과물들은 이들의 행위를 한갓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문열씨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의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주인공들은 그러나, “모두가 떠나간 폐광에서 홀로 탄을 캐”(328쪽)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과 함께, 아련한 슬픔과 분노의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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