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과서의 탄생
강진호 지음/글누림·4만원
‘국어’(國語)라는 말부터가 국가주의의 냄새를 풀씬 풍긴다. 대개의 한국인들이 ‘국어’를 ‘한국어’와 동일시하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국어, 곧 한국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일 뿐 중국에서는 중국어가, 일본에서는 일본어가 ‘국어’의 지위를 지닌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어 교재는 ‘조선어독본’이라 불렀고 일본어 교재 이름이 ‘국어독본’이었다는 사실은 ‘국어’라는 명칭에 눌어붙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찌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진호 성신여대 교수(사진·국문학)의 <국어 교과서의 탄생>은 근대 계몽기 이후 현재까지 조선/한국의 국어 교과서가 노정하는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강 교수는 앞서 국어학자인 허재영 단국대 교수와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어 교과서인 <조선어독본> 54종을 찾아내 5권짜리로 복원 출간했고(2010년), 그에 앞서 2007년에는 동료 학자들과 함께 <국어 교과서와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연구서를 낸 바 있다. 국문학자이자 비평가로 주로 분단문학 연구와 평론에 매진했던 그가 교과서 연구에 매달려 온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강진호 교수의 저서 <국어 교과서의 탄생>은 국어 교과서가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텃밭 노릇을 해 왔다는 주장을 담았다. 사진은 지난 시절 똑같은 교복을 입고 머리 모양 역시 획일적인 학생들의 수업 장면. 연합뉴스
“분단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교과서에 닿게 되더군요. 분단문학의 바탕에 반공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내재돼 있는데, 그 이데올로기의 주요 연원이 바로 교과서였습니다. 특히 국어 교과서에는 반공주의와 국가주의가 묘목처럼 심어져 있죠. 박정희 정권 이후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색채가 한층 짙어졌지만,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24일 전화로 만난 강진호 교수는 “국어 교과서의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서는 과정이 곧 분단 극복의 길이라는 생각에서 교과서 연구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국어 교과서의 탄생>은 근대 최초의 관찬 교과서인 <국민소학독본>(1895)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와 이승만·박정희 정권 시기를 거쳐 2002년 7차 교육과정까지 한세기 남짓한 국어 교과서의 역사를 훑으며 그 안에 자리잡은 국가주의(전체주의)와 반공주의의 폐해를 들춰낸다.
“<국어> 교과서에서 국가주의 관련 담론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 집권기인 2차 교과과정기(1963~1973)에서였다.” 이승만 정권하 1차 교과과정기(1955~1963)의 국어과 교육목표 제9항 ‘학생들의 개별적인 소질과 능력의 차이를 중시한다’가 빠지고 다른 항목과 중복되는 독서 관련 항목으로 대체된 것이 시사적이었다. 박종홍, 김기석, 최호진, 이은상 같은 2~3차 <국어> 교과서의 주요 필자들은 박정희가 쿠데타 뒤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재건국민운동본부’의 핵심 성원들이었다. 이들이 교과서에 실린 논설과 수필 또는 시와 희곡 등을 통해 전파한 국가 이데올로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애국주의와 반공주의의 뿌리”라는 것이 강 교수의 판단이다. 박종홍의 논설 ‘사상과 생활’과 ‘한국의 사상’, 이은상의 시조 ‘고지가 바로 저긴데’와 기행문 ‘피어린 육백 리’, 유치진의 희곡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등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정권기에 노골화한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천황을 정점으로 한 위계 교육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발행된 <초등 국어교본>은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보통학교 국어독본> 등을 상당 부분 답습하면서도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가람 이병기가 주도한 미 군정기 중등 국어교본만 하더라도 전체 필자 44명 가운데 홍명희 임화 이태준 오장환 등 좌익 및 월북 문인이 11명이나 포함된 반면 친일 인사의 글은 거의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에는 반공주의의 기치 아래 좌익 인사를 배제하고 우익 및 친일 인사들의 글이 교과서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런 면모는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더욱 강화됐다고 강 교수는 본다.
“국어교육 전공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제가 한 셈인데, 교과서에는 온갖 게 다 들어 있으니 문학 연구자가 할 일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연구 과정에서 국어 교과서 350권 정도를 확보했는데, 이것들을 전자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향후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