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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의주의 말몰이꾼

등록 2018-02-01 19:40수정 2018-02-01 20:01

강명관의 고금유사

북경을 향해 떠난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은 7월18일 요동 땅 고교보(高橋堡)란 곳에서 하루를 묵는다. 이곳은 4년 전인 1766년 조선 사신단이 은 1000냥을 잃어 낭패를 당한 곳이다. 사건이 보고되자 황제는 즉시 관은(官銀)으로 배상해 줄 것을 명하고, 해당 지방관을 파직했다. 절도범을 찾는 과정에서 용의자를 찾아 문초했던 것은 물론인데, 그 과정에서 중국인 너덧이 사망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교보의 중국인들은 조선 사신단의 하인들을 의심했고, 이후 조선 사람들을 원수처럼 보고 일체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

조선 사신단은 보통 200~300명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100명 가량이 짐을 실어 나르는 말몰이꾼들이다. 모두 의주 사람이고 해마다 북경을 들락거리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이들의 넉 달 노동에 대한 대가는 의주부에서 지급하는 종이 60권이다. 연암은 이들이 무언가를 훔치지 않으면 북경을 오갈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형편없는 보수 때문이다.

말몰이꾼은 압록강을 건너면 세수도 하지 않고 두건도 쓰지 않고 봉두난발로 말을 끌고 길을 걷는다. 흙먼지와 땀이 범벅이 되어도 바람에 머리를 빗고 쏟아지는 비에 목욕을 할 뿐이다. 갈아입을 옷도 당연히 없다. 연암은 함께 간 십오 세 소년이 처음에는 제법 말쑥하더니 이내 시커먼 몰골이 되었고, 급기야 구멍 난 바지 사이로 엉덩이를 보이며 걷더라고 말한다. 명색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단의 일원인데, 가난한 수행원들은 귀신도 사람도 아닌 꼬락서니가 되었던 것이다.

가난한 말몰이꾼은 예의도 염치도 없는 존재가 된다. 손에 걸리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기회만 닿으면 닥치는 대로 뭔가를 훔친다. 밤에 사신단의 숙소로 몰래 들어가 은을 훔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연암은 1766년의 은 분실 역시 의주 말몰이꾼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연암은 끝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병자호란 같은 환란이 다시 생기면, 용천(龍川)·철산(鐵山)(평안도 의주 바로 아래 지역) 서쪽은 우리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사람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몰이꾼들이 청의 앞잡이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절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빈곤으로 몰아넣어 절도를 강요하는 체제야말로 더더욱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암의 우려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입증되었다. 친일파 중에는 조선 사족체제 하에서 빈곤으로 내몰린 일부 민중들이 있었던 것이다. 최저임금제의 실시에 딴죽을 거는 사람들은 연암이 말한 의주 말몰이꾼의 사례를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경제적 평등은 사회를 통합하고 나라를 사랑하게 만드는 가장 정확한 방법일 터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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