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단편모음 ‘이조한문단편집’
부자 주인 훈계하는 도둑 무리 대장
과거제 혼탁, 도망노비의 반항도 그려
부자 주인 훈계하는 도둑 무리 대장
과거제 혼탁, 도망노비의 반항도 그려
이우성·임형택 편역/창비·각 권 3만원 “재물이란 천하에 공변된 것이지요.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쓰는 사람이 있고,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라. 주인 같은 분은 쌓아두는 사람이요 지키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쓰는 사람이요 가져가는 사람이라 할 터이지요. 줄어들고 자라나는 이치와 차고 기우는 변화는 곧 조화의 상도(常道)라. 주인장 역시 한낱 이런 조화 중에 기생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영남의 한 부잣집을 덮친 도적 무리〔群盜〕의 두령이 주인에게 들려주는 재물에 관한 생각이다. 일월영측의 ‘상도’까지 거론하며 사뭇 근엄하게 설파하는 이치가 그럴듯하다. 겁을 먹은 주인이 순순히 재물을 내주는 듯하다가 뒤로는 종들을 규합해 도적 무리에 맞서려다 들켜서는 호되게 당하는데, 그 당한 모양을 묘사한 대목이 이러하다. “눈이 빠진 놈, 팔목이 부러진 놈, 코피가 터진 놈, 뒤통수가 깨진 놈, 옆구리가 접질린 놈, 이가 빠진 놈, 귀가 떨어진 놈, 뺨이 팅팅 부은 놈, 이마가 부서진 놈, 발을 저는 놈, 뼈가 부러진 놈, 살가죽이 터진 놈, 숨을 헐떡이는 놈, 놀라 숨이 막힌 놈, 눈만 멀뚱멀뚱 넋이 달아난 놈,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놈, 그야말로 형형색색 구구각각으로 다치지 않고 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아주 죽도록 된 자는 하나도 없었다.” 다친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못 흥에 겨워 열거하는 부상의 유형 묘사가 판소리 사설이나 김지하의 담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익살맞다. 19세기 한문 단편집 <청구야담>에 실린 ‘군도 대장이 불어남과 줄어듦의 이치를 말하여 부호를 설득하다’라는 작품이다.
<이조한문단편집>은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던 18, 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담은 한문 단편들을 주제별로 모아 엮었다. 그림은 김홍도 작품으로 전해지는 <연광정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형택 교수.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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