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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선함과 겸손, 연민과 사랑이 기독교 왕국의 본질”

등록 2018-03-08 19:48수정 2018-03-08 20:04

초기 기독교 다룬 프랑스 소설 ‘왕국’
복음서 저자 루카와 사도 바오로 주인공
작가 자신의 신앙 이력과 고민도 버무려

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1만6800원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61)의 2014년작 <왕국>은 사도 바오로와 복음서 저자 루카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한 소설이다.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이 책은 여느 소설과는 크게 다르다. 여기에는 카레르 자신이 등신대로 나오며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다시피 한다. 바오로와 루카의 행적은 최대한 기록과 자료에 바탕을 두되 개연성 있는 상상력으로 빈 틈을 메꾸었다.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과 역사소설이 결합된 독특한 형식이다.

번역판으로 700쪽에 육박하는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 150여쪽에서는 작가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표현한 1990년대 초 3년간의 기독교도 시절을 돌아보고, 그 뒤에는 바오로와 루카의 행적과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전파와 확산 과정을 좇으며 ‘왕국’으로 상징되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을 궁구한다.

자신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따르겠노라던 신앙인 카레르는 3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런 고백과 함께 일단 물러난다. “주여, 이제 난 당신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날 버리지 마소서.” 그로부터 20년 뒤 <왕국> 집필에 나섰을 때 신앙에 관한 그의 견해는 ‘불가지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불가지론자’가 곧 ‘기독교인’이 아닐까라며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도 바오로와 복음서 저자 루카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되살린 프랑스 소설 <왕국>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림은 프랑스 원작과 한국어판 표지에 쓰인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작품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부르심>(1308~1311). 열린책들 제공
사도 바오로와 복음서 저자 루카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되살린 프랑스 소설 <왕국>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림은 프랑스 원작과 한국어판 표지에 쓰인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작품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부르심>(1308~1311). 열린책들 제공

바오로와 루카에 대한 연구는 이처럼 냉정한 불신자에서 열렬한 신앙인으로 거듭났다가 다시 불가지론자로 물러선 카레르가 기독교를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자 대화라 할 수 있다. 그 싸움 또는 대화는 매우 꼼꼼하고 치열한 것이지만, 책의 마지막 문장 “나는 모르겠다”에서 보듯 어느 한쪽의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은이의 한계나 불성실의 증거라기보다는 솔직함과 진정성의 표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는 1~2년의 오차는 있겠지만 대략 서기 50년 전후이다. 장소는 당시 소아시아라고 불리던 터키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한 항구, 트로아스이다. 이 시공간상의 정확한 지점에서 두 남자가 만난다. 후에 성 바오로와 성 루카로 불리게 될 터이지만, 아직은 그냥 바오로와 루카로 불리는 두 남자가 말이다.”

루카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사도행전> 16장을 근거로 카레르는 바오로와 루카가 처음 만난 때와 장소를 이렇게 적시한다. 신약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는 바오로의 서신과 루카의 두 저작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나머지 세 복음서와 <70인 역 성경>, 예수 어록인 <큐(Q)>, 여기에다가 지난 2천년간 축적된 기독교 연구를 바탕으로 카레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면모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바오로의 서신 중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과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썼다는 ‘야고보 서간’의 진짜 필자가 루카였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프랑스 소설가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제공
프랑스 소설가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제공

바오로의 서신에 세번 언급되는 루카는 그를 도와 기독교의 전파에 힘썼지만, 나중에는 기독교에 관해 그와 견해 차이를 보였다고 카레르는 파악한다.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데 반해, 루카는 부활에 대한 믿음보다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왕국은 선한 사마리아인들과 사랑할 줄 아는 창녀들과 돌아온 탕자들의 것이지, 사상적 대가들의 것도, 자신이 모든 사람의 위에 있다고 믿는 이들의 것도 아니라고” 루카는 생각했다.

“선의를 지닌 모든 이들을 스스로는 의식 못하는 기독교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루카”에게서 불가지론자가 곧 기독교인이라는 카레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그리스 출신인 루카는 자신이 쓴 복음서의 서두에서 그것이 ‘현장 조사’를 거친 ‘신뢰할 수 있는 보고서’가 될 것임을 약속했지만, 바로 그 다음 줄부터 “순전히 소설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소설가 동업 조합의 일원으로서 나는 다만 그(=루카)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라는 말을 보라. <왕국>은 루카에 빙의된 카레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선(善)임을 역설한 현대의 복음서라 할 법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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