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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현저동 생각

등록 2018-03-15 20:14수정 2018-03-15 20:25

서영인의 책탐책틈

지방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꽤 오래 살았다. 예전에 서울을 생각하면 나는 늘 ‘현저동’이 먼저 떠올랐다. ‘명동’도 ‘강남’도 아니고,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이유는 다들 짐작하다시피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서대문을 지나 ‘현저동 상상꼭대기’까지의, 여덟 살 꼬마의 야무진 서울 입성과 도시 사람의 위엄을 지키려 갖은 애를 쓰는 엄마의 걸음걸이가 그 때나 지금이나 생생하다. 서울에 살고 있는 지금도 현저동이 어디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지만 기억 속에서 현저동은 서울이라는 곳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내게 자리잡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박완서의 ‘현저동’뿐만이 아니다. 임화의 ‘종로 네거리’, 유하의 ‘압구정동’, 또는 양귀자의 ‘가리봉동’, 황순원의 ‘마장동’. 두서는 없지만 문학 속에서 익힌 서울의 지명은 그 목록이 길다. 거론되는 작가들이나 지명이 최신이 못 되는 것은 내가 책을 읽으며 서울을 상상했던 시절이 기억 속의 그때여서 그렇다. 그 지명을 떠올리면 거기서 살며 사건을 만들어낸 인물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이야기들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러다가 일년에 몇번 가지도 못하는, 갈 때마다 시골뜨기의 얼떨떨함으로 소외감만 느끼고 돌아오는 서울의 지명들이 왜 이다지도 익숙하고 생생한가 싶어, 괜히 약이 올라서 ‘현저동 생각’을 그만두었다.

얼마 전 부산의 문화재단 지원금 심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부산의 여러 작가들이 쓴 소설들을 한꺼번에 연이어 읽는 행운을 누렸다. ‘광안대교’이거나, ‘감천동’ 골목길이거나, ‘해운대’이거나, 익숙한 지명들이 소설의 배경으로 쉴 새 없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모르는 지명이 아닌데도, 심지어 한번도 가 본 적 없었던 현저동과 달리, 부산의 지명들은 내가 가 본 적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배경과 이야기가 겉돌아서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나는 자꾸만 흩어지는 집중력을 애써 다시 모아야만 했다. 작가들의 필력 탓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 내게 부산의 지명은 삶과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관광지였던 것이다. 부산이거나 대구이거나 인천이거나, 읽고 상상하고 유추하는 훈련이 충분하지 못했던 장소는 내가 살고 아는 것과 무관하게 생경하다.

따지고 보면 내 탓만도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는 거의 모든 사건들이, 역사가, 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서사화된 탓이었다. 미디어가 발전하고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서울은 모든 생활과 사건과 역사를 집어삼키고, 지방은 일회적 관광의 방식으로 주변화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필요하다. 거기에는 생활의 감각뿐 아니라, 역사의 감각, 문화의 감각이 필요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구체적 상상력은 그 모든 것의 축적과 총합으로 풍부해진다. 아마도 현저동이 내게 유난했던 까닭은, 서울역에서 현저동까지 여덟살 꼬마가 걸었던 길이 시골뜨기의 서울 방문의 경험 언저리에 겹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라는 역사적 개념을 서울을 중심으로 상상하고 배워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이야기가, 문학이 필요하다. 구글맵을 켜서 현저동을 찾아 보았다. 갑자기 현저동이 낯설었다. 오랜만에 해 보는 ‘현저동 생각’이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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