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보통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등록 2018-04-05 19:05수정 2018-04-05 19:35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탐정 혹은 살인자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2018)

얼마 전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등록한 친구가 “추리소설을 쓰는 너도 관심이 있을 만한 프로그램이 있다”며 교육과정표를 하나 주었다. 바로 민간조사, 즉 탐정 자격 취득 과정이었다. 각종 범죄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필적 감정이나 유전자 감식 등등의 기술을 알려주는 건 물론, 변장과 미행까지도 현장 실습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특공무술을 배우고, 사격훈련까지 해야 하다니! 안락의자에 앉아 회색 뇌세포를 굴리는 추리소설가에게 탐정이란 너무 문턱이 높다.

타이완 소설 <탐정 혹은 살인자>의 주인공 우청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40대에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좁고 낯선 워룽제 197번지로 들어가 오래된 4층 아파트 1층에 탐정 사무실을 열었다. 등록이 귀찮아 허가증도 받지 않은 중년의 초보 사설탐정. 그의 개업 동기는 타인과 자신을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탐정의 일상은 백수와 다를 바와 없었지만, 드디어 첫 번째 의뢰인이 찾아온다.

<탐정 혹은 살인자>의 기본 설정은 고전 추리소설의 인물인 사설탐정이 현대의 타이베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활약한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이제까지 널리 알려진 유명한 탐정들의 전형성을 따와서 변주했다. 필립 말로는 김릿을 마시고 제임스 본드는 젓지 않고 흔든 마티니를 마시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우청은 얼음 없이 설탕만 넣은 홍차를 마신다. 자료 조사는 도서관이 아니라 위키백과에서 시작한다. 우청의 의뢰인은 탐정소설답게 딸의 불안과 남편의 비밀을 의심하는 아름다운 부인이고, 운전하지 않는 탐정은 호기심 많은 택시 운전사와 함께 뒤를 쫓는다. 사건을 해결하거나 경찰에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의 탐정이 도리어 범인으로 몰린다는 전개도 낯설지 않다. 우청은 연쇄살인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저질러졌다는 것을 경찰에 알렸다가 피해자들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범인을 밝혀내야 한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역사 동안에 쌓여온 탐정 클리셰들에 기반을 두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재현될 때 독특한 감상이 생겨난다. 지나치게 일반화된 면이 있기는 해도, 이 책에서 우청이 비교하는 서구 사회와 타이완 사회는 외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흥미롭다. 즉, <탐정 혹은 살인자>는 서양에서 유래하여 아시아에 퍼져나간 탐정소설이 토착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그에 더해 주인공이 휘말린 연쇄 살인 사건은 흔히 짐작할 수 있는 동기가 아니란 면에서 개별성을 획득한다.

그래도 역시 탐정소설이란 사건의 긴장감만큼이나 탐정의 매력으로 이끌어나가는 장르가 아니던가? 열아홉 살 때부터 공황장애와 함께 살아온 우청은 탐정으로서 적당한 기술이라고는 딱히 없고 세상 상식 정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지식과 성찰을 과신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는 허술하고 시니컬한 성격이다. 하지만 조사 업무에 대한 열정, 자신의 불안을 끌어안고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캐릭터가 지니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탐정의 매력을 새삼 보여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샌가 민간조사 자격증 온라인 과정이라도 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