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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는 크고 시끄럽고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미국인 관광객”

등록 2018-04-05 19:29수정 2018-04-05 19:50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산문집 출간
크루즈 여행 비판, 테러장면 재방 냉소
자살로 삶 마감한 작가의 자학과 절망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옮김/바다출판사·1만6800원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1962~2008)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미완성 유작을 포함해 장편소설 셋과 소설집 셋, 산문집 셋 등을 냈는데, 특히 두번째 장편 <무한한 재미>(Infinite Jest, 1996)는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어 소설에 포함된 문제작이다. 그러나 이 책을 비롯한 그의 소설은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았고, 대학 졸업식 축사를 담은 책 <이것은 물이다>(2009)가 유일하게 번역 출간되었다(2012년).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그의 산문집 세권에서 가려 뽑은 에세이 아홉편을 엮은 책이다. 1997년에 낸 첫 산문집의 표제작을 제목으로 삼았고, <랍스터를 생각해봐>(2006)와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2012)의 표제작들과 비평 및 서평 성격 글들, 그리고 9·11 테러에 관한 글 등이 묶였다.

월리스의 에세이는 분야와 소재가 매우 다양하고, 때로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각주(의 각주)를 남발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카리브해 호화 크루즈 탑승기인 표제작을 비롯해 랍스터 축제 참관기,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에 관한 글, 카프카와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비평 및 서평, 9·11 테러에 대한 비딱한 관찰기, 영어 사전 서평 형식을 빌린 언어사회학적 에세이 등은 그가 어떤 소재와 주제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재능을 지닌 작가임을 알게 한다.

월리스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염세적이고 냉소적이며 신경질적일 정도로 예민한 작가의 성격이 만져질 듯 다가온다. 특히 옮긴이 김명남이 “이만큼 짜릿한 글을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극찬한 이 책 표제작은 그 소재인 호화 크루즈 여행뿐만 아니라 월리스라는 인간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그의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편역한 김명남은 “다만 괜찮은 한 인간으로 중독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데 자신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그를 평했다. ⓒMarion Ettlinger, 바다출판사 제공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그의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편역한 김명남은 “다만 괜찮은 한 인간으로 중독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데 자신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그를 평했다. ⓒMarion Ettlinger, 바다출판사 제공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비록 취재 의뢰에 따른 것이었다고는 해도 “자발적으로 또한 돈을 받고서” 경험한 7박8일의 크루즈 여행을 대하는 월리스의 태도는 자학에 가깝도록 비판적이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휴대하는 카메라를 전혀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뚤어진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크루즈를 상찬하는 선배 작가의 “예술인 척하는 광고” 글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크루즈 직원들이 기계적으로 지어 보이는 “프로페셔널한 미소”에 치를 떨며, 줄을 서서 버스에 오르는 승객들을 보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아우슈비츠행 탑승 장면을 닮았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데에 이르면 이런 도저한 회의와 절망의 뿌리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으며 그 결과는 ‘절망’이라고 월리스는 단언한다. 그가 말하는 절망이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십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고 스무살 무렵 첫 자살충동을 겪은 뒤 평생 항우울증제를 복용했으며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어두운 내면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식(美食) 잡지의 의뢰로 랍스터 축제를 취재하면서 “우리가 감각 있는 생물체를 그저 우리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산 채로 삶아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9·11 테러 직후 “방송국이 끔찍한 영상을 쉼 없이 다시 틀어주는 것이 그저 지금에서야 티브이(TV)를 틀었기 때문에 저 모습을 미처 못 본 시청자가 있을지도 몰라서만은 아닐 가능성”을 곱씹는 데에서도 월리스의 비판적·냉소적 성격은 잘 드러난다. 이런 월리스의 글을 읽으며 독자는 공감의 미소를 짓거나 불쾌감에 낯을 붉힐 수도 있겠는데, 김명남은 “그가 결코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흉측한 인간이 아닌 척 가장하는 것”이었다는 말로 월리스의 진심 쪽에 한표를 던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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