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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갈치 날고 귀 달린 뱀이 서식하는 신화적 공간

등록 2018-04-19 19:20수정 2018-04-19 19:54

유용주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나와
40년 만에 돌아간 고향 장수 이야기
세월호 비판과 날선 현실 풍자도 생생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유용주 지음/문학동네·8000원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는 <은근살짝>(2006) 이후 무려 11년 만에 나온 유용주의 네번째 시집이다. “삼포를 넘어 칠포 세대인”(‘시골 쥐’) 딸의 서울 변두리 차가운 방에서 소주로 냉기를 달래며 내뱉은 푸념의 말을 제목으로 삼았다.

제목은 그렇지만, 책에 실린 시는 거의가 시인의 고향인 전북 장수의 자연과 사람, 역사와 신화를 노래한다. 유용주가 열네살 나이에 중식당 심부름꾼으로 팔리다시피 떠났던 고향집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40년 만인 2011년 5월이었다. 그렇듯 어둡고 아픈 기억이 바탕에 깔려 있긴 해도, 다시 만난 고향의 산천과 이웃은 대체로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에서 시집 제목은 오히려 고향 장수의 따스한 품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시집 맨 앞에 실린 시 ‘뻥이라고 했다’는 이름부터 예사스럽지 않은, 그의 고향 마을 뒷산 신무산(神舞山) 어름의 신화적 존재들과 현상에 대한 목격담이다. “단자를 가다 시퍼렇게 불 밝힌 호랭이 새끼를 본 적이 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는 귀 달린 비얌, 산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고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강이 흐느끼고 산이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져 다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 세계야말로 고향 장수 출신 선배 작가 박상륭이 말한 바, 유용주 운문 정신의 육체이자 산문 정신의 뼈대라 하겠다.

11년 만에 네번째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를 내고 활짝 핀 봄꽃 나무 아래에 선 유용주 시인. “올 가을에는 산문집을 낼 계획이고, 중단편 소설도 한권 분량이어서 책으로 묶으려 한다”고 말했다. 유용주 시인 제공
11년 만에 네번째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를 내고 활짝 핀 봄꽃 나무 아래에 선 유용주 시인. “올 가을에는 산문집을 낼 계획이고, 중단편 소설도 한권 분량이어서 책으로 묶으려 한다”고 말했다. 유용주 시인 제공

“어릴 때처럼 별들이 흐르고 달이 이울고 뭉게구름이 떠 있고// 수제비와 팥죽은 없다”(‘묵언’ 부분)

“토옥동 계곡을 걸었다//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오소리를 읽었다/ 고라니를 읽었다/ 너구리를 읽었다/ 담부떼를 읽었다/ 멧돼지를 읽었다/ 그 위로 눈이 내렸다”(‘채근담을 읽었다’ 부분)

별과 달과 구름 같은 자연물은 어린 시절과 다름없지만, 수제비와 팥죽을 끓여주시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없다. “동백기름 발라 머리카락 단정한 이마 쪽찐 비녀// 댕댕이 소쿠리 속 때 절은 골무와 반짇고리// 끝내 하늘대못에 박혀 숨넘어간 어머이”(‘호미’)는 그가 하릴없이 타향을 떠돌 때에도, “달의 기억으로 내 모습 다시 뚜렷해질 때까지”(‘하프 마라톤’) 귀향의 꿈을 놓지 않도록 다독이고 격려하는 구원의 존재였다.

어머니를 잃고 고향집에 돌아온 그는 이제 짐승과 나무와 풀을 전적(典籍)처럼 읽는다. “밖으로 풀어지는 마음을/ 안으로 싸안고 겨울을 견”디는 계곡을 닮아 “침묵을 채찍질한다”(‘소한’). “촘촘한 그물이자 성긴 허공”이며 “격렬한 떨림이자 조용한 소멸”(‘첫눈’)인 첫눈에게서 배우고자 한다.

유용주 시인
유용주 시인

그러나, “담배와 술을 끊”고 “돈을 끊었”으며 “인간관계를 끊었”(‘신분 사회’)다고는 해도, 그가 독야청청 고독한 단독자의 삶에 갇힌 것은 아니다. 40년 만에 귀향한 시인에게 다시 만난 고향 사람들은 개호주와 산갈치, 귀 달린 뱀을 대신하는 일상 신화의 주인공으로 다가온다. “10년 이장을 봐서 마을 안팎을 훤하게 뚫는” “우리 동네 역사”이자 “도서관”이고 “귀신”이기도 한 재철이 양반(‘한량’), “라오스 친구가 올무를 놓아 잡은 멧돼지 갈비를 친척이라 먹지 못하는/ 수분초등학교 13회 동창인 그 녀석”(‘멧돼지’), “서른다섯 베트남 처녀에게 늦장가를 든(…)/ 올해 쉰여섯, 돼지띠” 병준이(‘동행’)가 그들이다.

그 병준이가 비아그라와 함께 다시 등장하는 ‘푸른 집 푸른 알?고산병 연구’, “땀 흘려서 밥을 번 적이 드물다는 평을 받고 살았다”는 “문기 형님” 이야기(‘기름장어’), “코너링이 좋은 것도 아니”(‘수용소’)어서 소총수로 배치 받았던 군대 회고담 등이 날선 풍자를 보여준다면, ‘평범한 악’과 ‘국가를 구속하라’에서는 세월호 사태를 겨냥한 시인의 피맺힌 육성이 들린다. 올 초 새로 구성된 한국작가회의 집행부에 자유실천위원장으로 참여한 유용주 시인은 “욕심을 버리자고 시골로 왔는데, 뜻밖의 직책을 맡게 됐다.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한다”며 “나보다 더 힘이 없는 이들, 특히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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