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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험 관련 책만 찾는 대학생 외국인들 왕성한 책욕심 배웠으면

등록 2005-12-01 20:04수정 2006-02-06 20:56


헌책방 순례/정은서점

은행나무가 여름의 기억을 떨구는 오후. 정은서점(02-323-3085·서대문구 창천동 92-6)은 유리문으로 계절과 격절돼 있다.

켜켜이 고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아득한 여행이 시작된다. 30평 사면 벽의 책들은 눈길이 높아질수록 과거로 이끈다. 사다리가 필요할 정도로 시간의 기울기가 가파르다. 하여, 나무 또는 알미늄으로 된 4개의 사다리가 갖춰져 있다.

가운데는 8개의 책꽂이가 두 줄로 분야를 나누어 시간의 축적을 받치고 있다. 벽과 책꽂이는 넘쳐난 책들을 치마처럼 둘렀다. 책꽂이는 새끼 책꽂이를 달아 분야에서 넘친 책을 거느리고,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는 3중 선반을 대어 두 분야에 걸친 책들을 이고 있다. ‘선반을 인 두 책꽂이’는 자연스럽게 문이 되어 책방 안 세 개의 문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 문을 지나면 실용학문에서 시·소설로 넘어간다. 두 권 이상으로 된 책은 비닐로 묶어 흩어짐을 막았다. 두번째 문은 창고. 그 곳에는 한풀 더 시간을 덮어쓴 영인본, 발굴보고서 등이 쟁여져 있다. 세번째 문은 왼쪽 벽 가운데쯤. 책을 사러 가는 일 외에는 종일 격절돼 있던 주인 정재은(60)씨가 안쪽에서 셔터를 내리고 현실로 돌아가는 작은 출구다.

오후 3시. 정씨가 오토바이 헬밋을 벗으며 들어왔다. 11시30분에 책방 문을 연 뒤 전화를 받고 책을 사오는 길이다. 그의 아침은 새벽 5시 운동으로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하고 부부가 함께 둘째 딸을 학교에 데려다 준다. 초등학교 때 하반신이 마비된 이후 중고교를 거쳐 대학생인 지금껏 거르지 않은 일이다. 달그락 달그락 늦은 점심. 71년 길음동에 점포를 내어 시작한 책방이 명지대 앞에서 살림집과 분리하면서 싸온 도시락이 20여년째다.

“열심히 살아도 별 볼 일 없더라고요.” 정씨는 20여년 써온 장부를 펴 보었다. 지난 10월 매출이 10년 전인 95년 10월치에 훨씬 밑돌았다. 그렇지만 그 동안 책방 보증금은 세배, 월세는 두배로 올랐다. 올들어 책을 한 권도 못 판 날도 있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69년 첫 직업으로 택한 이래 36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이름을 쓸 만큼 열심이었고 책을 돌리는 일을 ‘문화사업’이라고 자부해온 터에 황당하다. 지난 환갑날도 도시락을 싸들고 책방에 나왔다고 했다.

책상 위에는 걸레와 풀통을, 그 옆 손이 닿을 거리에 노끈과 청소기를 갖췄다. 시세와 개정판이 나온 해 등을 기록한 수첩, 인터넷에 올린 책 목록과 가격표는 손때가 묻었다. 눈 닿는 데에 버스노선표, 엔·원·달러 환율, 중국과 일본의 연호 등이 잘게 메모돼 붙여져 있다.


요즘 대학생들 단순하게 공부해 시험에 나오는 책만 찾는 반면 가끔 들르는 외국인들의 책욕심은 각별하다고 말했다. 한국학을 공부한 어느 일본인의 경우 들를 때마다 꾸러미로 사고 돌아갈 때는 택시를 부를 만도 한테 낑낑거리며 버스를 타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책들이 만만치 않으니 욕심은 금물. <여지도서>(국사편찬위), <청춘극장>(김래성, 성음사) <춘향전의 비밀>(설성경, 서울대출판부) <딸 그리고 함께 오르는 산>(제프리 노먼, 청미래) <현대의 섬>(정호경, 운디네)이 보인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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