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사할린 한인 문제를 둘러싼 한 러 일 3국의 외교협상
이연식·방일권·오일환 지음/채륜·1만6000원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2월, 승전 연합국인 미국과 소련은 ‘소련 점령지구 송환에 관한 미소 간 협정’을 맺었다. 패전국 일본의 점령지에 있던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의 본국 귀환에 관한 협정이었다. 대상 영토엔 러시아 극동과 일본 최북방이 맞닿는 사할린섬도 포함됐다. 당시 “3만명에 가까운 사할린 잔류 한인 사회는 이제는 ‘해방 국민’이므로 패전한 일본인들보다 먼저 귀국할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 기대는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협정문에 명시된 송환 대상자는 ‘일본인 (전쟁)포로’와 ‘일반 일본인들’로 한정됐다. 무국적 조선인들의 귀향길이 막혔고, 일본 국적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가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70여년이 흐른 지금 생존자는 거의 없고, 그 후대의 처지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구성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08년 사할린 현지에서 무연고자 묘비 조사 및 현지 사망자 유골의 국내 봉환 사업을 위한 기초조사 때 찍은 묘지 사진. 채륜 제공.
1945년 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이 항복한 뒤 소련군 장교들이 전 일본 경찰들을 상대로 일본 경찰서장의 조선인 학살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사할린주 기록보존소 소장. 2014년 이연식 촬영. 채륜 제공.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은 연구공동체 ‘아르고(ARGO) 인문사회연구소’의 연구위원 3명이 일제 강점기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해방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역사적 비극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실증적으로 파헤친 연구서다. 지은이들은 기밀 해제된 옛소련 정부의 자료들을 포함해 한·러·일 3국에서 새로 발굴한 공문서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한인 귀환 문제가 당사국들의 동상이몽 속에서 꼬여가는 상황을 재구성한다. 그 결과, 당시 소련이 ‘노동력 부족’ 내지 ‘점령지 생산력 유지’를 이유로 조선인들의 귀향길을 막았다는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예컨대, 송환 협정이 맺어진 다섯달 뒤인 1947년 5월 소련 외무부 극동과는 내무부와 국가안보부에 비밀 서신을 보낸다. “(…)남사할린 지역엔 2만2777명의 한인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스탈린 동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들의 조선(Korea) 귀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송환 여부에 대한) 의견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소련 내무부 장관의 답신이 갔다. “(…) 송환 조치에 이의가 없음을 밝힙니다. 다만 남사할린 내 한인들이 다양한 소비에트 경제조직에서 노동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소련국가계획위원회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지은이는 이런 서신 교환을 “당시 (소련) 내무부는 노동력에 대한 고려가 한인 송환을 반대할 정도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 시기에 사할린에 끌려가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모습. 사할린주 기록보존소 소장. 2014년 이연식 촬영. 채륜 제공.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뒤 사할린주 남부 해안도시 코르사코프에서 귀국길에 오른 일본인들의 행렬.(율리아나 진,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2015) 채륜 제공.
그런데 이들은 왜 귀환하지 못했을까? 여기엔 일본의 “교묘한 면책 담론”의 실태, 일본인 귀환이 완료된 지 두 달 만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한인 송환 논의 자체가 무기한 보류되다가 결국 정주화 정책으로 바뀐 사정, 초기 한국 정부가 이들의 ‘모국 정착’보다는 ‘일본 정착’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본과 갈등을 빚은 사실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말하자면 “사할린 한인은 식민 지배와 남북분단, 동서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강제동원과 반세기에 걸친 집단 억류라는 극단적 형태로 체험한 집단“이다.
지은이들은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대표 필자 이연식 연구위원은 <한겨레>와 전화 통화에서 “이 책에 실린 다수의 사진들은 연구팀이 사할린주 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것들로, 모두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사료들”이라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축소, 중단됐던 국가 차원의 피해 조사 및 연구, 지원 사업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