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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회적 죽음들을 상대로 한 대결 혹은 대화

등록 2018-05-24 20:25수정 2018-05-24 20:38

새의 시선
정찬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정찬(사진)의 소설집 <새의 시선>을 펼쳐 든 독자는 80년대에서 2010년대 현재에까지 걸친 사회적 죽음들과 고통스럽게 대면해야 한다. 1986년 대학생들의 전방 입소 훈련에 반대해 분신 자결한 김세진·이재호, 1999년 씨랜드 화재, 2009년 용산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책에 실린 일곱 단편 중 네편이 이런 사회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으며 때로는 둘 이상의 사건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나머지 세 작품에서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지는 않았다 해도 역시 주요 인물의 죽음이 소설을 끌어간다.

“소설 작업이 힘겨워진 것은 언젠가부터 쓰는 행위가 넋을 견디는 행위가 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였습니다.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넋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넋들에게 육신을 부여하는 것이 저의 소설 작업이었습니다.”

‘작가의 말’ 속 이런 고백은 이 소설집에 압도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들은 2014년 늦봄부터 지난해 여름까지 쓰였는데, 작가는 역시 ‘세월호’로 대표되는 사회적 죽음을 상대로 소설적 대결 또는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표제작 ‘새의 시선’은 1986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과 2009년 용산 참사를 포개 놓는다. 정신과 의사인 화자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손목 관절 통증으로 입원한 사진작가 박민우를 상담하며 통증의 심리적·정신적 원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2010년 말에 병원을 찾은 박민우와 상담을 통해, 그의 통증이 김세진·이재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본 일과 관련이 있음이 우선 밝혀진다. 이어서, 그가 경찰 채증 요원을 대신해 용산 참사 현장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시 그가 목격하고 기록한 충격이 20여년 전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매개를 거쳐 신체 통증과 마비 증상으로 나타난 것.

박민우는 의사와 상담 도중 누군가의 환영과 마주친다. 그 정체를 묻는 질문에 “불길을 견디는 존재”라고 답한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불길을 진실로 바꾸어도 되지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바꾸어도 되고요.”

소설 쓰기를 “넋을 견디는 행위”라 표현한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박민우 자신은 불길을 견디는 일에 최종적으로 실패해 비극적 선택을 하거니와, 김세진·이재호가 학교 앞에서 분신했을 때 같은 학교 의대생이었던 화자는 “그들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책하듯 곱씹는다. 이런 자문은, 불길 또는 진실과 고통을 견디는 일이 박민우만이 아니라 소설 속 의사와 작가 자신, 그리고 독자에게까지 전이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세월호 참사는 ‘사라지는 것들’과 ‘새들의 길’, ‘등불’에 연이어 등장한다. ‘사라지는 것들’에서 80년대에 광부를 그렸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붙들려가 호된 고문을 당했던 화가 형조는 마지막으로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를 품은” 새 그림을 그리고 죽는데, 세월호가 가라앉는 순간 그 딸은 엄마에게 이런 문자를 보낸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난 아빠의 그림 속 새가 되어서라도 엄마한테 갈 거니까!” 죽음과 그 기억이 초래한 압도적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몇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새라는 상징은 희망과 생명을 붙안으려는 작가의 안간힘으로 읽힌다.

최재봉 기자,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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