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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입 없는 것들의 입으로 말하다

등록 2018-06-07 19:24수정 2018-06-07 20:15

해자네 점집
김해자 지음/걷는사람·9000원

“밥맛 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부분)

비 오는 저녁, 밥 먹으러 오라는 아랫집 전화에 내려갔더니 이웃 ‘언니들’이 둘러 앉아 있다. 인용한 대목은 덕담을 반찬 삼아 그 언니들과 밥을 나눠 먹는 장면이다. 천안 광덕에 터 잡아 살고 있는 김해자(사진)의 새 시집 <해자네 점집>에 나오는 작품. “밥과 술 그리고 웃음까지 나눠 먹는 이웃들과 친구들”(‘시인의 말’)의 우정이 정겹고 미쁘다. 아마도 이렇게 밥을 나누는 언니들 가운데 한 사람이 화자로 나오는 시 ‘날랜 여자’에서도 그 지역 특유의 입말은 건강한 생명력과 촌철살인의 해학을 실어 나른다.

“지렁이가 꿈틀꿈틀헌다구유?/ 고거사 세멘 공구리 말이고 흙 우에선 안 그류/ 걍 크게 꿈틀하고 말쥬 두 박자꺼정 언제 가유/ 꿈틀하믄 벌써 샥, 흙덩이가 덮어주는디/ (…)/ 지렁이 좋아허냐구유/ 댁은 머 환장하게 좋아서 평생 서방 데꼬 사슈”(‘날랜 여자’ 부분)

입말의 생명력과 해학이 꼭 천안 언니들만의 몫은 아니다. 사드 배치 반대 시위에 나온 성주 ‘할매’의 말을 들어 보라.

“떡도 주제 감빵도 주제 노래도 하제 머라 외치쌌제, 얼매나 재밌노. 집이 있으모 깜깜하니 혼차 테리비만 보고 심심한데 여그 나오니 얼매나 좋노. 야야 떡도 참말로 맛있대이, 살 값이 개사료 값만 모하다 아이가, 참말로 개누리라 카이.”(‘성주군청 앞마당에서’ 부분)

김해자의 지난 시집 <집에 가자>(2015)의 표제작(‘피에타’)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무하고 천도하는 간곡한 어조로 읽는 이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돼지농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네팔인들(‘몰랐다’), 강압수사에 못 이겨 살인강도 혐의를 뒤집어쓰고 부당한 옥살이를 했던 세 청년(‘모른다’), 16주 동안 창문 없는 공간에 갇혀 액체 사료만 마시다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어쨌든 살아 있으면 된다’) 등을 호명하며 그들의 울음을 대신 운다. 세상 모든 존재란 “같은 울음 먹고 자란 형제”(‘형제여’)이며, 말과 문학과 시는 그 울음의 대신이어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산목숨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의 말 네 눈에 가득한/ 눈물이 아니라면 짐승의 살가죽에서 솟구치는 진땀이 아니라면/ 저 층층이 쌓인 책들과 이 많은 말들이 무슨 소용인가”(‘불구의 말’ 부분)

그래서다. 시인은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명령한다. 그들, “입 없는 것들의 입으로 말하라”고.

“대지를 휩쓰는 부황 뜬 세계 바다를 넘어, 사막에 천막을 세우는 집 없는 자들의 떠는 손으로 말하라, 영문 모르고 젖가슴에서 밀쳐진 아기 돼지의 입으로 말하라, 풀 비린내로 말하라 밟힌 꽃의 즙, 입 없는 것들의 입으로 말하라, 대신 말하라 아직 세상에 없는 나라의 말, 내 눈 감는 시간, 네 눈물에 젖은 내 입술로, 마지막 순간인 듯 지금 말하라”(‘밤의 명령’ 부분)

최재봉 기자, 사진 김해자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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