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난다·1만4000원
말도로르의 노래
로트레아몽 지음, 황현산 옮김/문학동네·1만5000원
문학평론가 황현산(73)의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는 2013년 6월 하순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6만부가 나갔다. 황현산은 모교인 고려대에 오래 봉직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번역가로 평론집과 연구서, 번역서를 여럿 냈지만, 문단 바깥에까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은 이 산문집이었다. 그로부터 꼭 5년 만에 나온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은 그 책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지은이가 그 사이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칼럼과 에세이가 시간순으로 묶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
서문에 나오는 이 대목은 <…사소한 부탁>이라는 집 앞에 세워진 안내문과도 같다. 2013년 3월 초부터 지난해 말까지 쓰인 글들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아우르지만,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과해 발화된다는 점에서 너른 의미의 문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문학 작품과 문학적 사유에 바탕해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고, 바깥 사회의 현실을 문학 안으로 끌어들여 궁구한다.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핵심 질료가 언어인 만큼 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인간의 깊이란 의식적인 말이건 무의식적인 말이건 결국 말의 깊이”라거나 “어떤 언어로 표현된 생각은, 그 생각이 어떤 것이건, 그 언어의 질을 바꾸고, 마침내는 그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세상을 바꾼다”는 견해, “시는 누릴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뛰어난 방식이자 그 희망을 가장 오랫동안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믿음이 그 사례들이다.
황현산의 생각에 말과 시 또는 문학은 민주주의의 수단이자 그 표현과도 같다. 한글날에 즈음해 쓴 글에서 그는 “사전의 이념은 민주주의”라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글과컴퓨터의 한글 입력 프로그램과 관련해 몇가지 ‘사소한’ 부탁을 하는데, “이들 지엽적인 부탁이 어떤 알레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곁들여 피력하는 데에서 보듯 그가 말하는 사소함은 결코 하찮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거나 봉사하지 않기에, 그 윤리의 뿌리와 현재적 의의를 성찰하는 여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며 생생하게 윤리적이다.”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과 번역서 <말도로르의 노래>를 함께 낸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책 제목에 글쓴이의 이름을 넣는 것이 약간 부담이 되긴 했지만, 세상에 대해 사소하게 말을 거는 방법이라는 생각에서, 그리고 그 사소함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무게감을 싣는다는 뜻에서 편집자의 제안에 동의했다”고 <한겨레>와 통화에서 밝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언어에 관한 ‘사소한’ 부탁은 그래서 문학에 관한 근본적 정의로 이어진다. 인용한 문장들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는 것이 곧 문학이라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정의를 떠오르게도 하지만, 그보다 한층 구체적이며 실천적이다. 때로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을 담기도 하는 문학 작품이 어떻게 윤리적 성찰과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파한다.
황현산의 산문은 그 자체가 “말의 깊이”를 통해 “인간의 깊이”를 보여주는 산 증거로 읽힌다. 섬세하면서 올곧고, 균형감과 유머감각을 아울러 갖추었다. 지난 정부가 일본과 맺은 위안부 관련 협약을 가리켜 “조카가 가진 땅을 헐값에 사보겠다고 엉뚱하게 팔푼이 삼촌을 꾀어 계약서를 쓴 꼴과 진배없다”고 일갈할 때, 독자는 필자와 더불어 통쾌한 분노에 동참하게 된다.
황현산은 평론이나 연구보다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텍스트 번역이 자신의 본분에 좀 더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밝힌 바 있다. 산문집과 함께 나온 로트레아몽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는 그가 공들여 온 작업이다. 살인, 신성모독, 사도마조히즘, 부패, 패륜 등의 방식으로 창조주와 인간 윤리에 맞서는 ‘반(反)영웅’ 말도로르의 이 기이한 노래는 초현실주의 미학의 선도적 모범으로 평가된다. “나로서는 차라리 그 배고픔이 태풍에 버금하는 상어 암컷과, 잔인성을 인정받은 호랑이 수컷의 아들이 되고 싶었으리라”,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답다!” 같은 표현은 세계 문학사에 뚜렷이 등재되어 숱한 아류와 변주를 낳기도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