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출신이지만 영어로 쓰는 작가 히샴 마타르(48)의 <귀환>은 지난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귀환>은 리비아 카다피 정권에 맞서다가 1990년 체포되어 투옥된 뒤 생사가 불분명한 채로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여정을 담은 자전적 작품. 리비아 현대사와 작가 자신의 가족사를 포개 놓은데다, 치열한 정치 투쟁 속에서도 시와 문학을 통한 정신의 성숙과 구원을 추구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깊은 감동을 준다. <한겨레>는 <귀환>의 작가 히샴 마타르와 단독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희생자의 아들인 동시에 논픽션 작가라는 이중의 정체성은 이 책 <귀환>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나, 아니면 어려움을 주었나?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 두가지는 이 책에서 한데 버무려져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결정을 내린 쪽은 작가라고 해야 하겠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임에도 소설을 읽는 것처럼 문장과 구성이 아름답고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 특징은 당신이 <귀환>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방해가 될까?
“고맙다. 분명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도한 기법인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 내가 아는 최선의 방식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의 소음을 통과하며 쓰였지만 동시에 개인 삶의 침묵 역시 다루고 있다.”
-당신의 소설 <실종의 해부학>(Anatomy of a Disappearance) 역시 아버지의 실종을 소재로 다루었다. 같은 소재를 소설로 쓸 때와 논픽션으로 쓸 때, 작가로서는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해준다면?
“대부분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서 비슷한 주제를 탐구한다. 소설에서 나는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대상과 거리를 두는 자유를 누린다. 논픽션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엇이든, 설사 자기 자신에 관해서라도, 이야기를 하자면 무언가를 꾸며내야 한다. 따라서 <귀환>에서 내가 사실에 충실하고 장소와 인물에 관한 묘사에서도 진실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자연스럽게도 내 나름의 초상과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귀환>에는 그리스 고전 중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 부자 이야기가 모티브처럼 저변에 깔려 있다. 서구 문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일단 보편적인 이해 근거를 제공할 것 같긴 한데, 작가 스스로는 어떤 맥락에서 또는 어떤 효과를 노리고 그 이야기를 활용했는지?
“내 생각에 모든 문학은 보편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국인이나 이탈리아인, 일본인이 된 적이 얼마나 많았겠나? 게이가 된 적은 또 얼마나 많았겠나? 여성이 된 적도 여러번이었다. 이런 일들은 내 정신뿐만 아니라 영혼 역시 확장시켜주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잃어버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당연하게도 언제나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종종 독서 과정에서 다른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서구 문화 전통에서 부자 관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유명한 가설은 프로이트의 그것이다. 살부(殺父) 충동이라 요약할 수 있을 그 가설은 당신의 소설 <실종의 해부학>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 반면, <귀환>에서는 그런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 차이는 소설과 자전적 논픽션이라는 장르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배경이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프로이트는 시인이었다. 내 말은, 프로이트가 글자 그대로의 교훈보다는 이미지와 병치(竝置)에 치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를 단순하게 독해한 데서 비롯된 사유의 줄기, 그러니까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치유된다는 생각이 있다는 말은 맞다. 극단으로 가면, 부모를 죽여 없앰으로써(물론 실제로 죽인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자유란 이해와 용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의 실제 삶을 상상해 보려 노력한다.”
-정치적 박해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헤어지는 일은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에서도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리비아 이외의 나라 독자들로부터 <귀환>과 비슷한 사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물론이다. 한국 독자들의 편지도 여럿 받았지만,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 레바논, 팔레스타인 독자들로부터도 편지를 받았다. 어찌 됐든 우리 인간은 우리 행성 전역에서 비슷하게 행동한다. 심지어 나는 우리 모두가 그야말로 형제자매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우리를 인류의 일원으로 더욱 깊숙이 연루시킨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와 바흐가 나의 형제이며 히틀러와 스탈린도 나의 형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산은 우리 모두를 매우 풍부한 복잡성의 땅에 위치시킨다. 내게 있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도 고통스러우며, 영광되면서도 수치스럽고,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아마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내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어넣어준다.
-당신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소설을 썼고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서도 시를 암송하는 등 문학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긴박한 정치 투쟁과 사회의 변혁 움직임 속에서 문학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을 일컫는 다른 말은 진실이다. 무엇이든 진실을 쓰려 한다면 글을 쓰는 목적과 욕심은 한쪽으로 치워 놓아야 한다. 문학은 자유에 관한 한 타협을 모른다. 글쓴이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롭겠노라 요구하는 게 문학이다. 만약 작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문학을 부리고자 하면 문학은 그 작가를 바보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학에는 문학 나름의 방식이 있다. 마음을 확장시키고 타인의 삶에 우리를 연루시킴으로써 그들이 타인이 아니라 우리와 아주 비슷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의 방식이다.”
-아버지에 관한 글쓰기는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다시 쓸 생각이 있나?
“내 느낌으로는 다른 주제를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가장 부정확한 판관일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배의 심장부에서 엔진을 작동시키고 있다. 갑판에서 보는 광경에 관해서라면 위층에 있는 독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아랍의 봄’으로 중동 지역 민주화와 자유 확산에 대한 기대가 높았는데, 그 뒤 이어지는 상황은 다소 실망스럽다. 현재 리비아의 실정은 어떤가?
“리비아는 젊은 나라여서 복잡한 역사와 힘겨운 현실을 지니고 있다. 이 나라는 과거의 유령들과 험하게 찢긴 현재라는 영토를 통과해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리비아는 또한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인데, 그렇다는 것은 종종 다른 나라들이 기생충과 같은 탐욕으로 이 나라를 바라보며, 슬프게도 그 나라 국민들 역시 종종 그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정상회담을 비롯한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특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고 그 뒤에 체제 안정을 보장 받는 이른바 ‘리비아식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리비아 모델이 리비아 비핵화와 중동 지역 평화에 어떤 기능을 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착에 이 모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시는지?
“그런 비교는 정확하지 않다. 리비아는 북한과 같은 종류의 핵무장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리비아 모델’이라는 것은(이것은 토니 블레어가 만든 말인데) 대체로 영국과 미국이 독재 정권을 상대하는 최초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런 행동은 인류의 진보보다는 돈에 의해 추동되는 측면이 강했다. 리비아 사람들의 일상 삶이 향상되지는 않았고, 실제로는 국민들을 억압하는 독재 정권의 힘이 더 커졌을 뿐이다. 심지어 영국과 미국이 리비아의 반정부 인사들을 리비아에 넘겨 고문을 받게 하기도 했다. 이게 ‘리비아 모델’이다. 내 생각에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나는 북한과 남한이 좀 더 의미 있는 해결책에 이르러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의 삶도 향상시키기를 희망한다. 남북 분단에 따른 고통은 측정하기 힘들 정도다. 이제부터라도 그런 아픔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 본 경험이 있는지? 있다면 느낌을 들려줄 수 있나?
“한국은 위대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 숱한 정치적 검열과 전쟁 및 분단으로 고통을 받아 왔다. 가령 나는 <한중록>과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를 잘 읽었다. 나는 또 한국의 전통음악, 특히 대금을 좋아한다. 한국 영화도 좋아하지만 특히 사진, 가령 배병우의 독특하게 정적이고 시적인 사진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고 대학 시절 이후 흥미를 지속시키게 만든 것은 한국의 달항아리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에서 달항아리를 처음 보았던 때가 생각난다. 두 부분이 하나로 합쳐져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 거기에는 이렇다 할 아무런 것도 담기지 않는다는 생각, 달리 말하자면 부재의 형태를 띤 그 모습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