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지음/한겨레출판·1만3000원
<체공녀 강주룡>은 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체공녀’(滯空女)라는 말은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신문·잡지에서 두루 쓰였다. 고무공장 파업을 주동하다가 을밀대 기와지붕 위에 오른 치마저고리 차림 주룡의 모습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전하는데, 잡지 <동광>에 실린 이 사진과 인터뷰 등 최소한의 자료가 작가의 상상력을 거쳐 장편소설로 되살아났다.
소설은 대체로 강주룡의 삶을 시간순으로 좇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짧은 두 장이 본문을 앞뒤로 감싸면서 문을 열고 닫는다.
“오래 주렸다.”
이런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 장에서 감옥에 갇힌 채 단식투쟁을 벌이는 주룡은 제 손에 이어 어깨와 머리와 몸통 전부를 목구멍에 넣어 오랜만에 배가 부른 느낌을 맛보고 마침내 몸이 뒤집어지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모로 누운 채 두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던 그는 간수의 발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자세를 바로잡는다. “등을 곧추세운 채로 발소리를 맞는 것이야말로 굶주린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가장 나중된 저항의 몸짓”이라 여긴 것. 이 짧고 인상적인 장면은 강주룡이라는 인물의 사람됨과 소설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아 보여준다.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박서련이 18일 오후 서울 공덕동에서 책으로 나온 수상작 <체공녀 강주룡>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이날 열린 시상식에서 “주룡의 이름을 이토록 집요하게 부른 첫 사람이 저라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0세기 벽두에 태어난 주룡이 처음부터 투사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였던 스무살에 자신보다 다섯살 어린 최전빈과 혼인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편을 따라 서간도 독립군 부대에 들어갈 때에도 그를 이끈 것은 애국심이 아니었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를 부려서 총을 잡게 했다.
남편의 이른 죽음 뒤 시댁과 친가 양쪽에 두루 실망하고 제 뜻에 따라 혼자 살기로 하면서 주룡의 주체적이고 저항적인 새 삶이 시작된다. 그는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처음부터 노동운동에 뜻을 품었던 것도 아니다. 애초 그의 꿈은 “모단 껄”(modern girl)이 되는 것.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으로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박서련 작가가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인근에서 촬영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비인간적 처우에 맞서 파업 투쟁에 나서면서 주룡은 조선노동당 출신 엘리트 정달헌을 만나 계급투쟁에 관한 학습에도 참여하지만, 지식인 출신 남성 활동가들의 위선과 한계를 이런 말로 비판하기도 한다. “시방까지 배운 바론 노동자가 으뜸이구 근본 되는 계급인데 실지로는 에리뜨들이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구 있다. 이거이 최근 나의 불만입네다.” 경찰 진압으로 파업 농성이 무위로 돌아간 뒤 단신으로 을밀대 지붕 위에 오른 주룡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이라며 버티지만 결국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을밀대 지붕 위에서 농성 중인 강주룡. <한겨레> 자료사진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은 옥중의 달헌이 면회 온 이가 전해준 신문·잡지 기사를 통해 주룡의 최후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을밀대 농성으로 체포되었던 주룡이 옥에서 풀려난 뒤 임금 삭감 철회 투쟁을 계속 벌여 결국 공장주한테서 철회 약속을 얻어냈지만, 그 자신은 다시 옥고를 치른 뒤 그 후유증으로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것. 달헌의 상상 속에서, 을밀대 지붕 위에 있는 주룡을 가리켜 누군가 “저기 사람이 있다”라고 외치는 소설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을 용산 참사와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 등 21세기 한국 사회의 아픈 현실과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체공녀 강주룡>의 작가 박서련은 18일 낮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반도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신선했고, 남들이 쓰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며 “80년 전 강주룡의 모습에 우리의 오늘이 겹쳐 있다고 느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