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작가가 2012년 2월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23일 오전 10시46분 별세했다. 향년 84. 고인은 지난 3월 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해왔다.
1934년(공식 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의 두만강변 국경 도시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뒤 원산으로 이사했다. 원산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벌어지자 가족과 함께 월남해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2017년에 명예졸업). 1959년 <자유문학>에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이듬해 10월 <세대>에 <광장>을 발표했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이었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광장>은 1960년 4·19 혁명의 문학적 적자(嫡子)였다. 주인공 이명준이 밀실과 광장으로 상징되는 남과 북의 정치 현실을 차례로 겪으면서 양쪽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제3국으로 가는 망명길에 바다에 투신해 죽는다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고발하는 한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이념을 상대로 한 사상적 고투를 보여주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서문에서 작가가 밝힌 대로 <광장>의 이념적 ‘모험’은 4·19가 열어젖힌 자유와 해방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이 소설이 60년 가까이에 이르도록 현재적 의의를 잃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에게 읽히는 까닭은 1960년 첫 발표 당시 작가를 괴롭혔던 남북 분단과 대결 구도가 여전하다는 민족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첫 발표와 단행본 출간(1961년) 이후 적어도 일곱번 이상의 크고작은 개작을 가한 것은 <광장>이 지닌 문학사적·시대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광장> 이후 최인훈은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총독의 소리> 같은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등을 꾸준히 발표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3년간 머문다. 197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부터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200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숱한 문인 제자를 배출했다.
1970년 신문에 연재한 장편 <태풍>, 그리고 1984년에 발표한 짧은 단편 ‘달과 소년병’ 이후 오랜 침묵을 지키던 그는 1994년 두권짜리 두툼한 장편 <화두>를 전작으로 내놓으며 극적으로 ‘컴백’했다.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나’의 고백체로 된 이 소설은 해방 뒤 북한에서 다녔던 중고교 시절, 전쟁 중 남으로 피난 와서 대학에 들어가고 군에 복무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한 과정, 세계 문명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변방의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왜소한 자의식, 옛 소련의 허무한 몰락을 바라보는 반성적 지식인의 사유,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소설을 쓰기까지의 고뇌와 모색을 담은 작가의 육체적·정신적 편력기라 할 만하다. 책을 내고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훗날의 한국 문학사에 작가 최인훈이 젊어서는 <광장>을, 나이 들어서는 <화두>를 썼다고 요약된대도 그다지 불만이 없겠다”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은 <광장>에 못지않았다.
<화두>에서 절정에 이른바, 최인훈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도저한 사유와 지성의 깊이라 할 수 있다. <광장>에서 <화두>에 이르는 소설들에서 최인훈은 조국의 분단 현실과 그 배경을 이루는 이념 대립, 그리고 그런 현실과 이념 지형 속 지식인의 역할 등에 관한 지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화두> 이후 다시 오랜 침묵에 들었던 그는 2003년 <황해문화>에 단편 ‘바다의 편지’를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 단편은 백골이 된 채 바닷속에 누운,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으로 짐작되는 인물의 독백을 통해 민족사와 인류사의 기억과 전망을 한데 버무린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것이 결국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는데, 2008년 기자들과 만난 그는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될 만한 미발표 단편 원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말을 가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한번 시도해 본, 매우 전위적인 작품들”이라는 작가의 말은 이 미발표 소설들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2012년 2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최인훈은 “역사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예술은 예술로서 쉽사리 변하지 않는 시원성(始原性)을 어떻게 하면 획득할 수 있나 하는 게 데뷔 이래의 화두였다”며 “결국 평생 한 가지 노래를 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2차 한국전쟁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며 “어떤 유행이나 서양식 철학보다 앞서는 한국의 소박한 토착 철학이 바로 이것이다. 그 결론이 먼저 있고, 그걸 어떻게 명제화하느냐는 학자나 예술가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광장>에서 ‘바다의 편지’에 이르는 소설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는 셈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25일 오전에 문학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열린다. (02)2072-2020.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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