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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옥에서 생명을 건져올리다

등록 2018-07-26 20:01수정 2018-07-26 20:52

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현대문학·1만3000원

김숨(사진)은 2016년 8월에 낸 소설 <한 명>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 그로부터 2년 만에 펴낸 소설 <흐르는 편지> 역시 위안부 얘기다. 시간은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 1942년 만주의 한 위안소에서 성노예 노릇을 하는 열다섯살 소녀 ‘나’를 화자로 삼았다.

원래 이름은 ‘금자’였지만 위안소에서는 일본 이름 ‘후유코’로 불리는 소녀는 위안소 근처를 흐르는 강물에 손가락으로 편지를 쓴다. 수신인은 고향의 어머니. 글자를 쓰기는커녕 읽을 줄도 모르는 소녀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다. 소녀는 고통스러운 위안소 생활 중 짬이 날 때마다 강물에다 편지를 쓴다. 소설 첫 문장은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이고,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이 문장과, 마지막에 나오는 “어머니, 오늘 밤 나는 아기를 낳을지도 몰라요”라는 문장이 <흐르는 편지>를 앞뒤로 감싸고 있는 셈인데, 300쪽 가까운 소설 본문은 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삶의 세목을 묘사하면서 뱃속 아기를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 변화 과정을 좇는다. 전작인 <한 명>에서는 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육성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으로 위안소 내 삶을 그렸던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증언들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소설적으로 복원한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위안부들의 삶은, 어느정도 각오를 한 독자가 읽기에도 참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꽁보리밥에 단무지, 멀건 된장국으로 연명하며 하루에 수십명씩 군인을 받고 수시로 얻어맞기까지 하는 이들이 자신과 타자를 인간으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젖가슴을 더듬는 게 손이 아니라 이빨 같다. 굶주린 들개의 이빨이 물어뜯는 것 같다.” “내 아래를 후비는 게 군인의 몸에 달린 살덩어리가 아니라 밤송이 같다.”

그럼에도 소녀는 전투를 앞둔 군인이 살아 돌아오기를 빌어주며,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죽은 일본 군인들 무덤에 향을 피우고 합장을 하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죽기를 바랐던 뱃속 아기를 결국 낳기로 마음먹기까지 심경의 변화에도, 전투 중에 한쪽 팔을 잃고 땅바닥에 뒹굴며 “엄마, 엄마”를 외치는 일본 군인을 목격한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군인의 외침을 뱃속 아기의 부름으로 새겨 듣는 소녀는, 그 어떤 비인간적 범죄와 악행 앞에도 무릎 꿇지 않는 연민과 생명의 가치를 구현해 보인다.

글 최재봉 기자,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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