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이 폭염 기록을 갈아치운 1일 낮,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국관광공사 2층 찻집에서 ‘구보스데이’(구보의 날) 예비모임이 열렸다. ‘구보스데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을 기리는 행사.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6월16일을 그 주인공 이름을 따 ‘블룸즈데이’로 기리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올해 예비모임에 이어 내년부터 정례화할 계획이다.
구보의 둘째아들인 박재영(76)씨와 정호웅(홍익대)·정현숙(한림대)·김명석(성신여대) 교수 등 국문학자, 일본인 한국문학자인 와타나베 나오키 일본 무사시대학 교수, 서지학자인 김종태 변호사, 구보학회 간사인 유승환 대전대 박사후연구원 등 10여명이 이날 예비 모임에 참석했다. 이들이 이날을 예비 모임 날짜로 잡은 것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날짜가 1934년 8월1일이기 때문. ‘구보스데이’의 핵심 행사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 발길을 따라 서울 시내 중심가를 걷는 것인 만큼 더위가 한창인 8월1일은 피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박재영씨는 “구보는 15년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았는데, 이깟 더위쯤 이겨 냅시다”라며 일행을 독려했다. 구보 박태원이 월북 뒤 마지막 15년 동안 실명 상태에서도 소설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 말이었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부친 박태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자 등과 적극적으로 교류해 온 박재영씨는 이날 모임에서 “‘구보스데이’ 행사를 내년부터 정례화하자면 관련 단체의 재정 후원이 필요한데, 최근 대산문화재단 쪽에서 후원을 할 수 있다는 언질을 받았다. 서울문화재단 등 다른 단체의 후원도 알아보겠다”고 보고했다.
박태원 탄생 100주년이었던 2009년 구보학회 총무로서 ‘구보 따라 걷기’ 행사를 주관했던 정현숙 교수는 “당시에는 학생과 일반 시민을 포함해 100명이 넘는 인원이 행사에 참여해 소설 무대를 함께 걸었다”며 “소설 속 주요 현장에서 소설의 해당 장면을 낭독하고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독자들이 구보의 문학과 서울의 문화 유적에 대해 한층 큰 애정을 지니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면 시내 곳곳의 계단과 바닥 등에 단테의 <신곡> 구절들을 새겨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며 “마찬가지로 구보의 소설 속 현장에도 소설 구절을 새긴 작은 판석을 마련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했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차남인 박재영씨(지팡이 짚은 이)가 1일 낮 서울 청계천 광교를 건너며 부친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찻집에서 예비모임 겸 회의를 마친 일행은 구보의 생가 터인 한국관광공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광교를 통해 청계천을 건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앞부분에는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본다”는 문장이 나온다. 광교를 건넌 구보는 종각과 화신상회를 거쳐 동대문행 전차에 오른다. 환승을 포함해 5.7㎞쯤 전차를 탔던 구보는 다시 청진동 제비다방과 카페 낙랑파라, 광화문통, 경성부청(서울시청), 남대문, 경성역(서울역) 등을 거치며 총연장 15.7㎞(건축학자 조이담이 정리한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에 따름)의 ‘구보 노선’을 걷는다. 그러나 1일 예비 모임에 참가한 일행들은 광교를 건넌 다음 무교동을 지나 서울시청 지하에서 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가는 도중에, 청계천을 배경으로 한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의 주요 무대인 모전교 앞 이발소 자리에서도 박재영씨의 설명을 듣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행사에는 소설가 박찬순도 참가했다. 구보 박태원에 관한 두 단편 ‘신천을 허리에 꿰차는 법-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성북동 230번지’를 써서 지난 3월에 낸 소설집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에 실었던 그는 “박태원은 형식과 소재, 내용상으로도 다양한 실험을 한 작가임과 동시에 유쾌함을 발명해 내는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었던 쾌남아였다”며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그의 소설 무대를 더 길고 오래 걷고 싶었는데 날씨 때문에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부터는 정례화한다니, 아일랜드의 블룸스데이처럼 많은 시민과 독자가 구보 따라 걷기에 참가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무더위와 싸우며 부친의 소설 무대 일부를 답사한 박재영씨는 “오늘 막상 걸어보니 너무 무더운데다 8월1일이란 휴가가 시작되는 무렵이라 많은 분들이 참여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재가 끝난 게 9월19일이니 그날을 구보의 날로 정해서 내년부터는 구보 따라 걷기와 국제 문학 심포지엄, 공연, 전시 등 관련 행사를 그 무렵에 치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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