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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쿠데타다” 탱크들이 몰려왔다

등록 2005-12-08 16:38수정 2005-12-09 14:04

지난 11월 10일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칠레에 도착하기 전 선내에서 칠레 현대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그의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철권통치를 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시대가 사진과 함께 게시돼 있다. 피스보트/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지난 11월 10일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칠레에 도착하기 전 선내에서 칠레 현대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그의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철권통치를 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시대가 사진과 함께 게시돼 있다. 피스보트/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1973년 9월11일 아침 포위된 대통령궁 ‘미제 전투기’까지 날아와 무차별 포격 “아옌데 대통령 자살” 군부 발표했지만 그의 죽음 둘러싼 의문점 아직 안풀려

현장속 현장/칠레 아옌데 대통령 경호원의 증언

1973년 9월11일, 역사상 자유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이었던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가 집권 약 3년만에 미국이 지원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총을 들고 저항하던 아옌데는 최후의 라디오 연설에서 “칠레국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외친 뒤 곧 숨졌다. 타살인지 자살인지는, 권좌에서 물러난 ‘더러운 전쟁’의 주역 피노체트가 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지난 9월 세계 각국의 시민운동가 등 1천여명과 함께 ‘피스보트(평화의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출항한 이래 105일 동안의 일정으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세계를 돌고 있는 <한겨레> 정인환·이정용 기자가 지난달 중순 칠레 현지에서 보내온 것이다. 아옌데 경호원이었던 사람의 입을 통해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들어본다.

‘대통령의 친구들’(GAP)로 불린 아옌데 대통령 경호팀의 일원이었다. 1973년 9월11일 브루노는 이른 새벽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라디오를 켜자 심상찮은 뉴스가 흘러 나왔다. 발파라이소 지역에서 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날 아침 6시께 아옌데 대통령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쿠데타가 시작됐으며, 반란군의 목적지는 수도 산티아고가 될 것이라는 보고였다. 7시30분께 대통령궁(모네다)에 도착한 그는 20명의 경호원과 너댓명의 각료 등에 둘러싸여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8시께 그의 두 딸과 비서진이 대통령궁으로 합류했다. 이 때 쿠데타군은 이미 발파라이소를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궁 방어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주한 군은 넓은 광장이 있는 대통령궁 남쪽과 북쪽 두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 배치시켰다. 오전 9시께 대통령궁을 겨냥한 첫 총성이 울렸다. 외곽 경비를 맡았던 경찰과 군 요원들은 줄행랑을 친 지 오래였다. 이어 대통령궁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과 함께 안전한 망명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는 제안이었다. 한마디로 이를 거부한 아옌데 대통령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통령궁 북쪽 끝자락 2층의 집무실 안에는 경호원 20명과 경찰병력 18명, 두 딸을 포함한 5명의 여성과 각료·비서진 등 8~10명이 모여 있었다.

여성 내보낼 때도 계속된 총격


“일 때문에 남부지방에 내려갔다가 전날 밤에야 산티아고로 귀환했다. 쿠데타임을 직감하긴 했지만,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 집에 잠깐 들렀다가 복귀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날 브루노가 트럭을 얻어 타고 대통령궁 부근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께. 막 총격전이 시작된 직후였다. 군인들의 눈을 피해 걸어서 대통령궁 쪽으로 다가가면서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건물 옥상마다 저격병이 배치돼 있었고, 탱크와 군 병력을 가득 실은 트럭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대통령궁 동쪽 건물에선 경호팀 동료 몇 명이 소총으로 탱크와 맞서고 있었다.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변 건물 2층으로 올라간 그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이곳에서 나가라.”

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아옌데 대통령은 여성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 두 딸은 남겠다고 고집했지만, 그의 완강한 설득에 밀려 결국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여성들을 내보낸다고 군쪽에 연락을 했지만,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에도 남쪽 알라메라 거리 쪽에서 발포는 계속됐다. 2시간 가량 이어지던 무차별 총질은 오전 11시께 갑자기 멈췄다. 긴장된 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 대통령궁 북쪽에서 2대의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에서 하루 이틀만 저항을 이어가도, 전면적인 민중항쟁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대통령궁 폭격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미제 전투기’는 대통령궁 북쪽 들머리에 ‘미제 폭탄’을 떨어뜨렸다. 굉음과 함께 대통령궁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다.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이 대통령궁 2층 중간지대로 이동해 방독면을 착용하고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는 사이, 군 병력이 대통령궁 진입작전에 들어갔다.

“삽시간에 건물 1층을 장악한 군은 2층 공략을 시작했다. ‘닥터 아옌데’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더 이상 죽지 말라고 권유했다. 쿠데타 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들에게 포로 대우를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새벽 5시 “쿠데타다” 탱크들이 몰려왔다 칠레 아옌데 전 대통령 경호원의 증언
새벽 5시 “쿠데타다” 탱크들이 몰려왔다 칠레 아옌데 전 대통령 경호원의 증언
총을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간 이들은 군홧발과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당한 뒤 어디론가 끌려갔다. 오후 2시~2시30분께 상황이 종료됐다. 이날 모네다에서 숨진 사람은 아옌데 대통령과 ‘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국정방송 <채널 7>의 기자 에르네스토 올리바레스 등 두 사람뿐이다. 당시 군부는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발표했고, 1990년 실시된 검시 결과도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브루노는 아옌데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자살하는 데 사용됐다고 발표한 소총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선물한 것이다. 닥터 아옌데에게 군을 장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실패한 뒤 호신용으로 준 것이다. 총신이 길기 때문에 자살에 사용하기 어려운 총이다. 자살이라면 군부가 책임질 필요가 없지만, 만약 쿠데타군이 대통령을 암살했다면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다. 비밀리에 진행된 검시 결과를 믿기도 어렵지만, 주검에 여기저기 총상이 있었던 건 지금껏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브루노는 대통령궁에 군이 진입하는 걸 확인한 뒤 오후 1시께 현장을 빠져 나왔다. 대통령궁 동쪽 건물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하던 동료도 주차장을 통해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궁 안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20명의 경호팀 동료 가운데 2명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흘 뒤 돌연 총살에 처해졌다. 나머지 18명은 군부대에 구금됐는데, 이 가운데 ‘엘라디오’와 ‘치코 세르히오’ 등 2명은 다른 죄수들과 뒤섞여 탈출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쿠데타 당시 대통령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생지옥’으로 변한 경기장

“나머지 동료 16명은 모두 총살당했다. 군부는 이들의 주검에 수류탄을 던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오랜 세월 실종으로 처리돼 있었다.”

30여년 전의 일을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의 눈에서 굶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처음엔 울 줄도 몰랐고, 울 수도 없었다”며 “나중에야 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을 탈출한 브루노는 산티아고 남쪽 공단 밀집지역인 코르도네스 인더스트리아로 달려갔다. 그곳 노동자들에게 쿠데타의 전모를 알리고 저항군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날 밤 공단에서 방어선을 조직하며 밤을 지샌 그와 동료들은 다음 날 아침 8시께 총질을 해대며 밀고 들어온 군에 모두 체포됐다.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군용트럭에 태워진 브루노 일행은 시내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산티아고 시내는 공포로 얼어 붙어 있었다. “이미 5천명 이상이 끌려와 있었다. 대표적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붙들려와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어봤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 채로 대단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튿날 그곳에서 총살당했다.”

경기장 안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있었다. 체포돼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스탠드뿐 아니라 운동장 안에까지 연행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브루노는 나흘 뒤 더 넓은 국립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그가 도착할 무렵 이미 3만5천~4만 명 가량이 구금돼 있었다. 그곳에서 고문은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선 아옌데 정권에서 일했던 인물로 보이는 ‘변절자’가 종이봉투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요주의 인물'들을 군인들에게 찍어 주고 있었다.

‘죽음의 대학’이라고 불렀던 국립경기장 생활은 체포된 지 3개월 여 만인 그 해 11월16일 극적으로 끝을 맺게 된다.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군부는 경기장 스탠드를 구역별로 나누어 체포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하루는 펜스 넘어 옆 구역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니, 통금 위반으로 붙잡혀온 사람들인데 오늘 나간다고 말했다.”

생각하고 말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펜스를 뛰어 넘었다. 통금 위반자들과 뒤섞여 운동장으로 내려섰다.

이후 그는 혁명좌파운동(MIR)의 지하 조직원으로 반독재 투쟁을 이어가다가 도시빈민 지원활동에 눈을 돌렸고, 지난 2000년부터는 원주민 인권운동에 전력하고 있다. 당시 95명의 ‘대통령의 친구들’ 가운데 살아남은 23명은 요즘도 정기적으로 모인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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