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창비·1만5000원 시작은 ‘야동 순재’였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문화방송(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가 ‘야한 동영상’을 우연히 접한 에피소드를 다루며 탄생한 이 단어는 해당 캐릭터의 높은 인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단어가 지닌 무게감은 자꾸만 가벼워졌다. 예능프로그램에 남성 패널이 나와 ‘야동’을 이야기하는 건 으레 유머로 소비됐다. 유희를 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국산’ 딱지가 붙은 영상이 대부분 불법촬영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몸이 포르노로 소비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한 여성들은 ‘야동’ 대신 ‘디지털 성범죄’라는 이름을 붙였다. “명명은 해방의 첫단계”라는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이러한 호명은 “숨겨져 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세상에 드러낸” 셈이 됐다. 솔닛은 신작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명명’과 ‘호명’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여성혐오, 미국 대선, 기후변화, 젠트리피케이션 등 그의 사유는 다양한 영역을 교차하며 뻗어나가지만, 핵심은 결국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다. 언어는 때론 진실을 지우고 왜곡하며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는 것이 곧 변화의 시작이라고, 솔닛은 말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한국 독자들을 위한 특별 서문과 ‘미투’ 운동에 관한 글을 추가로 실었다. 지난해 방한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던 솔닛은 여전히 냉소를 경계하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가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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