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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타자이며 우리이고, 시원이며 궁극인 너는

등록 2018-10-25 20:08수정 2018-10-26 17:05

너는
곽효환 지음/문학과지성사·9000원

곽효환(사진)의 네번째 시집 <너는>은 크게 보아 네 개의 공간에 걸쳐 있다. 우선, 그의 이전 시집들에서도 두드러졌던 ‘북방’이 있다. 만주와 몽골, 백두산과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이 공간은 그의 학위논문 주제와도 연결되는 상실과 그리움의 땅이다. 그런데 새 시집에서는 잃어버린 고토(古土)로서 북방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맺는 관계를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변모를 보인다.

“우즈베크어를 모르는 나의 국적은 우즈베키스탄/ 거주지는 경기도 안산 러시아 마을 염료 공장 쪽방촌/ 내 아들은 직업을 찾아 모스크바 근처 어디에/ 늙은 에미는 타슈켄트 외곽 고려인촌에 산다//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다시 연해주로 모스크바로 서울로 유전하는 나는/ 나의 조국을 모른다”(‘나는 고려 사람이다’ 부분)

북방이 잃어버린 역사와 그리움의 공간이라면, 시인의 직장이 있는 광화문은 그의 생활 공간이자 현실의 축도다. 갖은 취지와 주장을 담은 집회와 시위로 언제나 들끓는 광화문광장에서 시인은 자주 길을 잃는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그는 “말과 시간〔이〕 회색 콘크리트 광장을 맴돌다 곤두박질치고 처박히고 더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곽효환 시인은 최근 그의 네번째 시집 <너는>을 펴냈다. 사진 곽효환 시인 제공
곽효환 시인은 최근 그의 네번째 시집 <너는>을 펴냈다. 사진 곽효환 시인 제공

“나는 여전히 광장에서 길을 잃고 서성인다/ 부끄러움에 가슴으로 흐느끼며/ 그날을 잊지 말자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어느새 조금씩 가라앉고 점점 느슨해져가는 슬픔을/ 그 마음과 그 기억을 부여잡고 묻는다/ 그날 아침/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아니/ 그날 이후 내내 무엇을 했느냐고/ 나는,/ 우리는”(‘2014 여름, 광화문광장에서’ 부분)

생활과 당대 현실의 공간인 광화문에 대비되는 것이 유하 시인의 ‘하나대’에 견줄 법한 시인의 고향이다. ‘마당을 건너다’ ‘마당 약전(略傳)’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같은 시들에서 회고되는 고향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달과 별과 호랑이, 고래와 바다”(‘마당을 건너다’)가 있는 원초적 공간이자, “내가 받았고 다시 내 아이에게 건네줄/ 마을 가득했던 몸서리치는 무서움(…)/ 눈망울에 가득 찼던 호기심”(‘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의 마르지 않는 샘이기도 하다.

마지막 공간은 유형의 공간이 아니라, 이별 뒤 시적 화자의 내면에 생긴 구멍 혹은 흉터다. “한때는 단단했으나 조금씩 녹아/ 어느새 부유하는 유빙의 위태로운 미련”(‘사랑 이후’) 또는 “손 내밀어 더듬어도 끝내 닿을 수 없는/ 나를 닮은 당신의 빈손”(‘오월의 그늘’)으로 표현되는 실연의 상처는 사실 이번 시집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지만 “아무 데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는/ 너라는 깊고 큰 구멍”(‘너는’)이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북방 및 고향과의 공간적·시간적 거리, 그리고 현실의 결핍과 질곡을 그것은 두루 상징하는 것. 시집 앞에 붙인 ‘시인의 말’이 그래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너는,/ 타자이면서 우리이다./ 시원이면서 궁극인 너는/ 끝내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타자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곽효환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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