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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가 아는 베토벤은 베토벤이 아니다

등록 2018-11-16 05:59수정 2018-11-16 19:58

벨기에 음악학자·지휘자 카이에르스
최신 연구 집대성 베토벤 전기 출간
사료 기반해 잘못된 통념 바로잡아
영웅 신화 벗기고 ‘인간 베토벤’ 복원
베토벤
얀 카이에르스 지음, 홍은정 옮김/길·4만5000원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그가 황제가 된 데 실망해 악보를 찢어버린 ‘공화주의자’, 궁핍한 환경과 난청이란 운명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웅’, 난해한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사중주 곡들로 인해 대중의 외면 속에 쓸쓸하게 말년을 보낸 예술가….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베토벤의 모습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오랜 기간 집요하게 베토벤과 관련된 사료들을 수집해 섬세하게 베토벤의 삶을 복원해온 서구 음악학계가 거둔 성과다. 이런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베토벤의 본모습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전기가 국내에도 출간됐다.

음악학자이자 지휘자인 얀 카이에르스가 <베토벤>에서 주적으로 삼는 이는 베토벤의 지인이자 1840년 나온 첫 번째 전기의 저자 안톤 쉰들러다. 1970년대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범죄학 연구팀은 쉰들러가 저지른 ‘범죄’를 밝혀내 ‘베토벤학’에 큰 충격을 줬다. 쉰들러가 베토벤의 순수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베토벤이 쓴 대화 수첩을 없앴다는 알려진 사실 외에도, 자신이 베토벤과 실제 대화를 나눈 것처럼 내용을 첨가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베토벤의 개인사만이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 교향곡 8·9번에 관한 전통적 해석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베토벤을 낭만주의 영웅으로 격상시킨 로맹 롤랑이나 자국 문화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으려는 독일인들과도 차별성을 보여준다. 벨기에 출신의 현대 음악학자인 카이에르스에겐 그런 식의 의도와 필요가 없다. 돈에 집착하고,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고, 사창가에 드나들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베토벤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고 어떤 변명도 해주지 않는다.

카이에르스가 교정하는 다양한 통념 중 하나를 보자. 나폴레옹이 자신을 스스로 황제로 선포하자 베토벤이 분노하며 ‘보나파르트’라고 적힌 3번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 내동댕이쳤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는 독재에 맞서는 예술의 저항 또는 베토벤의 공화주의적 신념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미화됐다. 하지만 베토벤이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과 연관 짓지 않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정세 변화였다. 그가 살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까지 벌이게 된 상황에서 적국의 황제를 찬양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몇 년 뒤에 프랑스 특사가 빈을 방문하자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즉위를 예찬하고 자신이 귀족 칭호를 받을 수 있는지 묻는 모습을 보면 그가 공화주의 신념에 투철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외에도 베토벤이 9번 교향곡의 작곡을 20대부터 기획했다든지,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이외의 인물을 ‘불멸의 연인’이라고 확정한다든지 하는 오류들을 바로잡는다. 그동안 최신 연구를 반영하지 않고 별다른 사실 확인 없이 쓰인 국내 클래식 입문서들이 죄다 다시 쓰여야 할 판이다.

벨기에 루뱅대 교수이자 지휘자인 얀 카이에르스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베토벤에 씌워진 허상을 벗기는 전기 <베토벤>을 출간했다. 미국의 팝아트 화가 앤디 워홀의 <베토벤>(1987년). 출처 위키아트
벨기에 루뱅대 교수이자 지휘자인 얀 카이에르스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베토벤에 씌워진 허상을 벗기는 전기 <베토벤>을 출간했다. 미국의 팝아트 화가 앤디 워홀의 <베토벤>(1987년). 출처 위키아트

카이에르스는 진정 위대하며 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베토벤이란 인물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라고 본다. 카이에르스는 베토벤이 어떻게 피아노 소나타, 현악 사중주, 교향곡 등 해당 장르가 가진 가능성을 모두 소진해버리고 새로운 장을 열어젖혔는지 보여준다. 특히 이 대목에서 카이에르스가 음악적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대중들도 논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음악가라는 점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 카이에르스는 2014년 사망한 명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으며 ‘베토벤 아카데미’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지휘자다. 2009년 이 책을 출간하고 2010년 ‘르 콩세르 올랭피크’란 악단을 조직해 베토벤 시대 빈 스타일의 연주 기법을 복원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는 17일 이 책을 중심으로 강연할 예정인 나성인 <음악저널> 예술감독은 “베토벤의 방대한 스케치를 토대로 베토벤이 어떻게 곡을 완성해나갔는지 작곡의 과정을 따라가는 대목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지은이가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 책의 출간은 국내의 음악학과 음악출판의 초라한 현실 또한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그동안 베토벤 전기에 관해서 한국은 말 그대로 섬이었다. 그나마 현대에 쓰인 저술인 메이너드 솔로몬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한길아트)은 베토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설하려는 목적이 강한데다 2016년에 절판됐다. 베토벤을 영웅화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소설가 로맹 롤랑의 (소설에 가까운) <베토벤의 생애>(1903년)가 여전히 가장 많이 읽히는 베토벤의 전기인 상황이다. 사실 베토벤만이 아니라 바흐, 쇼팽, 쇼스타코비치 같은 주요 작곡가들도 읽을 만한 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의 배경엔 음반과 공연 시장의 3%밖에 되지 않는 클래식 음악의 왜소한 저변과 음악계의 왜곡된 관행이 있다. 최유준 전남대 교수(음악학)는 “음악가 전기 저술이나 번역은 음악학자가 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음대에선 음악학자들이 정년이 돼 퇴임하면 그 자리를 채우지 않을 정도로 음악학을 홀대하는 상황이다. 지방대에선 음악학이 살아남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음대에서 연주자들을 교육할 때도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작곡가의 삶이나 음악이론에 기반해 어떻게 곡을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선 잘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음악인들부터 이런 전기를 번역하거나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더는 다르게 연주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없이 연주되는 베토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새로운 자신만의 베토벤을 연주하기 위해선 근원으로 돌아가 베토벤이란 작곡가와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카이에르스의 <베토벤> 출간으로 국내 클래식 연주자들의 베토벤 해석에 변화가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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