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으로 가는 길-서양 고전 문헌학 입문안재원 지음/논형·2만2000원
서양 고전 문헌학의 국내 권위자인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가 서양 고전 문헌학 입문서 <원천으로 가는 길>을 냈다. 서양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앞으로 공부할 뜻을 품은 학생들을 위해 서양 고전 문헌학이란 어떤 학문인지 그 역사와 실제를 강의하듯 풀어낸다. 책은 서양 고전 문헌학의 역사(1부)와 함께 어떤 작업을 하는지 살펴보는 실제(2부), 서양과 동양 문헌학의 만남(3부)을 다룬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오토 폰 코르벤이 그린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1886년). 논형 제공
서양 고전 문헌학은 “말과 글을 전하는 문헌의 전승 관계를 조사하고 그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그 시작은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대규모로 문헌을 수집한 이 도서관에선 자연스럽게 분류와 교정, 편집 등 문헌학의 초기 형태들이 나타났다. 서양 고전 문헌학은 로마로 수용되었고, 중세 유럽을 거쳐 르네상스 시대에 활짝 꽃피운다. 14세기에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인문주의의 시조’ 페트라르카(1304~1374)는 문헌을 비교하고 교정하는 비판정본학의 첫 계단을 놓은 문헌학자였다.
르네상스라는 말을 학술어로 처음 사용한 문헌학자 페트라르카(1304~1374). 논형 제공
근현대 서양 고전 문헌학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원래 문헌학자였던 그는 문헌학이, 독일이 로마처럼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으로 나가는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헌학자 울리히 빌라모리츠는 고전 문헌학이 독립된 학문으로서, 철저하게 자료에 기반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본(Bonn) 사태’라고 불리는 이 논쟁에서 패배한 니체는 문헌학계를 떠났고, 고전 문헌학은 독립적 학문으로 흔들리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이탤릭체로 출판한 단테의 <신곡>(1502). 논형 제공
서양 고전 문헌학의 시각으로 동양 고전 문헌을 바라보면 어떨까?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고전 문헌도 비판 정본 작업이 되지 않은 것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판소리 텍스트인 <춘향전>도 현재까지 확인된 판본이 105개에 이르지만 비판 정본 작업을 하지 않은 상태다. <춘향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춘향전>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 정본으로 삼아야 할 판본은 뭘까. 아니, 제목부터 <춘향전>이라고 해야 할까 <춘향가>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은 춘향인가 몽룡인가?
안 교수는 비판 정본 작업엔 국가 차원의 지원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비판 정본 작업을 하기 위해선 문헌을 수집해야 하는데, 이는 개인이 부담하기엔 비용이 많이 들고 개별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100종이 넘는 <춘향전> 판본을 개인이 전부 수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판 정본 작업에 국가까지 나서야 하는 이유는 한국 인문학이 수입인문학을 넘어 자생인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원전 장악 능력이 부족하면 결국 국외의 권위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둔황학 같은 경우 서양의 학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이는 동양의 학자들은 독자적 이론 구성 능력도 밀리고 정본 작업도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춘향전>과 같은 고전 문헌의 비판 정본 작업을 방치해둔다면, 이후에 다른 나라 학자가 만든 비판 정본을 수입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안 교수의 경고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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