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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도 행복하게 함께 했던 ‘김 추기경과 40년’ 추억해요”

등록 2019-02-13 21:46수정 2019-02-13 22:04

[짬] 문학평론가 구중서 명예교수
1976년 12월26일 김수환(오른쪽) 추기경의 영명축일(스테파노) 미사를 마치고 함께 한 구중서(왼쪽) 평론가.
1976년 12월26일 김수환(오른쪽) 추기경의 영명축일(스테파노) 미사를 마치고 함께 한 구중서(왼쪽) 평론가.
“가톨릭 입문은 21살 때 친구 권유로 서울 신당동 성당에서 세례(베네딕토)를 받았으니 60년이 넘었네요. 35살 때부터 김수환 추기경의 그늘에서 일을 했고 선종 며칠 전 병실에서까지 그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으니 제 삶의 사표이자 멘토이시죠.”

가톨릭문인회장을 지낸 문학평론가 구중서(83) 수원대 명예교수가 평전 <김수환 추기경 행복한 고난>(사람이야기 펴냄)을 쓴 이유다. 김 추기경 선종 10일만인 2009년 2월 하순 가장 먼저 냈던 평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책만드는집 펴냄)를 10주기를 맞아 보완해낸 증보판이다.

1971년 서울대교구장 김 추기경이 발행인으로 창간한 가톨릭 잡지 <창조>(가톨릭출판사)의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는 지난달 말 책을 건네주며 39년간 지켜본 김 추기경의 삶과 일화를 담담히 들려줬다.

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2009년 첫 평전 이어 개정증보판

71년 ‘창조’ 발행인-편집주간 인연
필화사건·정간 겪으며 11년 근무
사회비판 발언 등 원고 ‘감수’ 담당
“창간사 ‘인간성 회복’ 지금도 절실”

선종 10주기 맞아 나온 개정증보판 <김수환 추기경-행복한 고난>.
선종 10주기 맞아 나온 개정증보판 <김수환 추기경-행복한 고난>.
“27살 때 문학평론을 시작한 이후 월간 <다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가톨릭 신자라고 <창조> 편집 담당으로 추천을 했더군요. 몇번이나 사양하다가 71년 여름 명동성당 안 서울대교구 주교관으로 찾아가 김 추기경을 만났어요. 처음 만난 그때부터 내내 15살이나 아래인 저를 ‘구 선생님’이라 불렀어요. 급여나 원고료, 백승철·김성종 등 편집진 구성과 필자 선정까지 전권을 맡겨줬구요.”

그날로부터 같은 건물의 건너다 보이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이가 된 그에게 김 추기경은 최고 성직자의 위엄이나 발행인의 권위보다는 ‘소탈한 직장 상사’였다. 그해 9월 첫 편집기획안 보고 때부터 한마디 ‘지시’도 ‘간섭’도 하지 않은 대신, 창간사나 기고문을 직접 메모한 뒤 조용히 ‘감수’를 맡기곤 했다. 어느 해 한여름에는 뒷마당에서 ‘황구탕 회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물론 김 추기경의 원고는 늘 손댈 곳이 없었어요. 편집회의도 소집한 적이 없었구요. 전적으로 믿어주고 통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두 사람의 신뢰를 한층 다지게 해주는 ‘필화 사건’도 겪었다. <창조> 1972년 4월호에 김지하의 시 ‘비어’를 실었다는 이유로 잡지는 판매금지 당하고, 이미 3월 사직한 양한모 가톨릭출판사 부사장과 구 편집주간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뤄야 했다. “중정에서 풀려나와 출판사에 사직서를 냈더니 문책은커녕, 3개월 휴가를 줬어요.”

(이미 1970년 5월 <사상계>에 풍자시 ‘오적’을 발표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중이었던 김지하는 ‘비어 사건’ 때문에 마산 요양원에 연금됐고, 이때 그를 찾아가 위로해준 인연으로 김 추기경은 이듬해 4월 결혼식 주례를 해주었다.)

그런 끈끈한 ‘의리’로 그는 11년간 추기경과 함께 일했다. 유신독재시절 언론자유를 위한 사회적 발언 관련 초고를 맡기도 했던 그는 어쩌다 외부 청탁 원고를 도와줄 때면 ‘고료 봉투’를 두고 서로 양보하는 실랑이를 벌인 추억도 있다. 76년 김 추기경의 사제 서품 25돌 은경축 기념집 <사회정의>, 81년 <대화집:김수환 추기경> 등도 그가 편집했다.

1971년 9월 <창조> 창간호. 필화 사건 이후 72년 11월 자진폐간됐다.
1971년 9월 <창조> 창간호. 필화 사건 이후 72년 11월 자진폐간됐다.
편집주간을 하면서 대학원을 마친 그가 83년 수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발행인’의 배려 덕분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과 지식인선언 서명 등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음에도 김 추기경의 추천서와 신원보증 덕분에 전임으로 임용될 수 있었어요. 그때 직접 쓴 ‘2가지 추천서’를 보여주며 고르게 하고는 하나를 버리려고 해서 기념으로 간직해 두기도 했지요.”

그는 김 추기경이 생전에 가장 즐거워했던 일도 공개했다. ‘휴일이면 전용차 운전기사(김요한)을 데리고 점퍼같은 평상복 차림으로 달동네를 순례하곤 했어요.”

그가 평전을 낸 이유에는 이처럼 고난의 시절을 행복하게 감내해낸 ‘인간 김수환’의 꾸밈없는 면모를 널리 전하고 내내 남기고자 함이다. “‘이념을 떠나 인간 회복의 정신으로 이 땅의 진실된 역사 창조에 우리 모두가 이바지해야 한다.’ <창조> 창간사에서 김 추기경이 강조한 ‘인간성 회복’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되찾아야할 지향점이라고 생각해요.”

구 명예교수는 “김 추기경이 사회참여에 앞장섰던 것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5년)의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면서 “이는 보수 진보 등 이념을 넘어서 하느님의 같은 자녀들인 ‘인간’의 존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김 추기경 자신의 신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지난 11일부터 명동성당 1898광장에서 추모 사진전을 개막했고, 14일에는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한다. 16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선종 10주기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17일 토크콘서트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 18일엔 선종 10주기 기념 음악회도 연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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