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학렬 지음/앨피·1만5000원 ‘유신의 추억’이라는 말은 이율배반처럼 들린다. 현대사 중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추억’한다니. ‘조잡미’가 풀풀 나는 표지 역시 이 시절의 무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이 책은 유신을 진심으로 추억하지 않는다. 다만 멀쩡한 사람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올림픽을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삶터에서 쫓겨나던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때도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정겨운 일상은 있었듯이 유신 때도 가수나 운동선수에 열광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삶은 있었다는 걸 생활사적 측면에서 보여준다. 또한 경찰이 자를 들고 다니며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재고, 국가가 학생 도시락의 쌀 보리 비율까지 통제하던 시절이 얼마나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폭력의 세월이었는가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비(B)급 표지와 제목이 그럴싸하다. 새마을운동, 가정의례준칙, 김대중 납치사건, 고교평준화 등 1972년 유신헌법 선포에서 1979년 10·26 사태까지 유신을 상징하는 열쇳말들을 70개 뽑아 에피소드 식으로 소개하는 유신 ‘입문’서다. 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지은이는 지루한 역사 연표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에게 옛날 얘기로 분위기를 바꾸는 선생님처럼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각각의 열쇳말을 풀어나간다. 유신헌법, 긴급조치, 인혁당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 사이로 일상을 파고들었던 유신의 집요하고도 뻔뻔스러운 체제 전략이 흥미롭다. 한 예로 지금은 공안검사의 상징 정도로 기억되는 오제도가 유신체제의 반공 드라마에서는 ‘영웅’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그는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그린 드라마 <추적>의 인기로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고, 그의 회고록은 당시 중·고등학생 필독서로 널리 읽혔다. 지금의 엘리트 체육 파탄에 씨앗을 심은 것도 박정희 체제임을 명확히 한다. 박정희 정부는 가난했던 시절 스포츠 선수에게 보내는 열광에 주목하고 당시 북한이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자 1966년 태릉선수촌을 만들어 엘리트 체육을 위한 담금질을 시작했다. 이후 ‘사라예보의 기적’ 등의 성과도 냈지만 “코치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맞았으며 넘어지자 계속 발길질”을 하는 폭력이 일상화됐다. 여성 선수들은 24~25살에 ‘노병’으로 은퇴하는 것도 예사였다. 허례허식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1973년 제정한 가정의례준칙의 바탕에는 공동체 의식에 대한 두려움, 즉 “부정의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민중이 모이는 것, 대표적인 장이 축제와 결혼식, 장례식”을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음도 말해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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