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가 라캉의 핵심저작
판권 계약 25년 만에 출간돼
라캉 국내 전문가 4명이 말하는
‘에크리’의 핵심과 읽기의 방법
판권 계약 25년 만에 출간돼
라캉 국내 전문가 4명이 말하는
‘에크리’의 핵심과 읽기의 방법
자크 라캉 지음,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새물결·13만원 “<에크리>가 어려운 것을 우연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선집의 겉표지에 ‘에크리’라고 적으면서 스스로 다짐한 바는 나에게 쓰인 것이란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이 <세미나 11> 후기에서 자신의 <에크리>를 두고 한 말은 그의 책만큼이나 유명하다. 에크리는 라캉이 쓴 유일한 책이다. ‘에크리’는 프랑스어로 ‘쓴 것’, ‘글’이라는 의미다.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표한 서른 편의 논문들을 라캉이 나름의 순서로 재배치했다. 현재도 간행이 되고 있는 <세미나>는 강연을 녹음해서 다른 사람이 펴내는 저작이지만, <에크리>는 라캉이 직접 쓰고 여러 번 수정해서 냈다는 점에서 한층 더 중요성이 강조되는 저작이다.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쉽사리 번역을 허락하지 않았던 <에크리>가 저작권 계약 25년 만에 우리 손에 쥐어졌다. “20세기 인문학의 에베레스트”란 출판사의 설명처럼 좀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이 대작의 등반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오랜 기간 라캉을 연구해온 강응섭 예명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서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김석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 백상현 한국라캉칼리지 상임교수에게 물어봤다.
자크 라캉의 생전 강의하는 모습.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우리가 무의식의 코드라는 이처럼 비옥한 영역을 발견하고 의미의 연쇄 전체 또는 몇몇 연쇄를 통합해낼 수 있게 된 것은 라캉 덕분이다. 이 발견은 정신분석을 전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생전의 자크 라캉의 모습. 미셸 푸코는 <코리에라 델라 세라>에서 “(라캉의) 글쓰기의 모호성은 주체의 복합성 자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나’를 완전히 바꾸는 어떤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즐거운 지옥”이었던 25년 ‘에크리’ 번역
새물결 출판사가 저작권을 보유한 사위 자크 알렝-밀레 등 자크 라캉의 유족과 번역 계약을 맺은 것은 1994년이다. 저작권료는 600달러. 기간은 무제한. 그 뒤로 25년 동안 번역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번역자들은 절망과 용기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어떤 번역자는 상당 부분 번역을 하다가 ‘이건 번역을 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이걸 번역하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번역 원고를 회수해 간 일도 있었다. 그렇게 거쳐간 번역자들이 모두 10명에 이른다. 조형준 새물결 발행인은 “출판사가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기가 그렇더라. 그래서 돈도 많이 잃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번역에 공백이 생긴 부분은 조 발행인이 직접 번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나무 위에서 울면서 떨어지지 않는 묘기를 부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은 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가 없더라. 누군가를 비꼬는 이야기 같은데 라캉이 명확하게 밝히질 않아서 짐작도 되지 않았다. 프랑스인 파리 7대학 교수를 만나서 번역이 막히는 부분을 물어봤는데, 이 친구도 ‘쓰여 있는 건 프랑스어가 맞는데, 의미는 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프랑스인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번역을 하겠나,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마치 허먼 멜빌의 <백경>의 에이허브 선장 같았다. 고래를 잡아서 끌고 온 건지, 고래한테 끌려 간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크리> 번역에 고난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읽다보면 라캉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유를 밀고 나가면서 새로운 사상을 발생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에크리> 번역은 그야말로 즐거운 지옥이었다.”
저작권자 쪽에서 영문판을 제외하곤 역자 주와 해제, 후기를 절대 첨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3년 전에 번역 원고를 유족들에게 보내 검토를 거쳤는데, 이런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어떤 문장은 무려 6가지 뜻으로 해석되기까지 하는 책인데도 이런 것들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어판 번역자도 화가 나서 따로 주석서를 낸다고 하는데, 그 책이 나오면 번역해볼 생각이다.”
그동안 번역비에, 3권 분량의 책을 한 권으로 내느라 책 값이 비싸졌다는 것이 조 발행인의 해명이다. “1판으로 먼저 1천부를 찍었다. 이후에 전공자들의 지적이 있으면 이를 반영해 번역을 고쳐나가려고 한다. 10년간 영문판을 번역한 브루스 핑크가 역자 서문에서 <에크리> 번역을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썼다. 한국어판도 동일하게 진행 중인 작업이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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