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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에크리’라는 에베레스트를 오른다

등록 2019-02-22 06:00수정 2019-02-22 19:04

정신분석가 라캉의 핵심저작
판권 계약 25년 만에 출간돼
라캉 국내 전문가 4명이 말하는
‘에크리’의 핵심과 읽기의 방법
에크리
자크 라캉 지음,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새물결·13만원

“<에크리>가 어려운 것을 우연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선집의 겉표지에 ‘에크리’라고 적으면서 스스로 다짐한 바는 나에게 쓰인 것이란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이 <세미나 11> 후기에서 자신의 <에크리>를 두고 한 말은 그의 책만큼이나 유명하다. 에크리는 라캉이 쓴 유일한 책이다. ‘에크리’는 프랑스어로 ‘쓴 것’, ‘글’이라는 의미다.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표한 서른 편의 논문들을 라캉이 나름의 순서로 재배치했다. 현재도 간행이 되고 있는 <세미나>는 강연을 녹음해서 다른 사람이 펴내는 저작이지만, <에크리>는 라캉이 직접 쓰고 여러 번 수정해서 냈다는 점에서 한층 더 중요성이 강조되는 저작이다.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쉽사리 번역을 허락하지 않았던 <에크리>가 저작권 계약 25년 만에 우리 손에 쥐어졌다. “20세기 인문학의 에베레스트”란 출판사의 설명처럼 좀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이 대작의 등반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오랜 기간 라캉을 연구해온 강응섭 예명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서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김석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 백상현 한국라캉칼리지 상임교수에게 물어봤다.

자크 라캉의 생전 강의하는 모습.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우리가 무의식의 코드라는 이처럼 비옥한 영역을 발견하고 의미의 연쇄 전체 또는 몇몇 연쇄를 통합해낼 수 있게 된 것은 라캉 덕분이다. 이 발견은 정신분석을 전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자크 라캉의 생전 강의하는 모습.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우리가 무의식의 코드라는 이처럼 비옥한 영역을 발견하고 의미의 연쇄 전체 또는 몇몇 연쇄를 통합해낼 수 있게 된 것은 라캉 덕분이다. 이 발견은 정신분석을 전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에크리>는 어떤 내용인가?

김석 라캉이 낸 수수께끼다. 가장 먼저 나오는 논문이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다. 편지는 즉, 글자(Letter)를 뜻하기도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이 언어라는 의도에서 이 논문을 처음에 배치한 것이다. 마지막에 배치한 논문은 <과학과 진리>다. 책의 순서 자체가 언어에서 시작해 욕망을 거쳐 진리로 가는 구상을 보여준다.

김서영 <에크리>에서 라캉은 새로운 프로이트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같은 성적인 개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캉은 가장 프로이트적인 것은 언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어 속으로 태어난다. 그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말하지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절대로 완전히 전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뭔가 어긋나 있다. 비어 있는 틈, 구조가 완전히 닫히지 않게 하는 결여가 있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의 구조를 넘어선 것, 이 둘의 관계를 풀어낸 것이 바로 라캉의 <에크리>다.

-매우 난해한 저작인데, 어떻게 읽어야 하나?

김서영 <에크리>가 악명 높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첫 번째 논문인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을 분석하는 문학 비평으로 굉장히 재미있다.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은 곧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란 명확한 주장이 있기 때문에 의외로 잘 이해가 되는 부분도 꽤 있다. 라캉을 프로이트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캉을 읽으면서 프로이트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좋다.

김석 책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나 기능의 형성자로서 거울 단계’, ‘정신분석에서의 말과 언어의 기능과 장’,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 같이 많이 인용되는 논문부터 반복적으로 읽어보는 것이 낫다. 또한 <에크리> 해설서를 통해 기본개념을 알면 다가가기 쉽다. 한국어판만 읽으면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모르면 영역본이라도 구해서 같이 읽어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백상현 <에크리>만 읽으면 라캉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다. <에크리>는 1960년대 중반까지의 논문을 모은 것이라, 그 이후에 정신분석을 언어적 실천이자 창조적 행위로 보는 급진적인 라캉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미나>와 그 강해서를 같이 읽어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생전의 자크 라캉의 모습. 미셸 푸코는 <코리에라 델라 세라>에서 “(라캉의) 글쓰기의 모호성은 주체의 복합성 자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나’를 완전히 바꾸는 어떤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생전의 자크 라캉의 모습. 미셸 푸코는 <코리에라 델라 세라>에서 “(라캉의) 글쓰기의 모호성은 주체의 복합성 자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나’를 완전히 바꾸는 어떤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라캉은 한국 지식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강응섭 한국의 지식담론을 이끌었던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 1980~88년 군사독재에 의해 폐간된다. 이 시기에 라캉에 관한 첫 번역서와 첫 논문이 나왔다. 이 두 지면에서 다뤄온 민족, 분단, 리얼리즘과는 결이 다른 욕망의 목소리가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해 튀어나왔고 이후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줬다.

김석 1980년대 후반부터 포스트모던 사상가의 하나로 이름이 많이 등장했지만 독자적으로 연구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특히 정신분석을 대중화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라캉이 정신분석을 말하면서 프로이트의 중요성도 다시 부각됐다. 욕망, 성, 환상을 이야기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와 미술, 문학 비평에도 영향을 많이 줬다.

김서영 라캉이 처음엔 자아심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자아를 강화하는 방식의 접근에 반대했다. 모든 치유는 기존의 구조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인문학에 미친 영향도 컸다. 유럽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오히려 임상보다 인문학과 예술 쪽에서 수용이 빨랐다.

백상현 현존 철학자 중에선 알랭 바디우가 가장 영향력 있게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는 라캉이 멈춘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라캉이 주체와 진리의 개념을 정립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판이든 추종이든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라캉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서영 우리는 아직도 실천적으로 라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린 자신이 아는 지식과 확신 안에서 결판을 보려고 하는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쉽고, 빠르게,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건 모두 라캉에 반하는 것이다. 자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사람은 낫지 않는다. 자아의 확신을 무너뜨리고 무의식으로 복귀하라는 라캉의 구호는 21세기에도 유용한 조언이다.

김석 라캉의 저서는 아직 국내에 세 권밖에 번역되지 않았다. 아직 라캉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선 라캉이 슬라보이 지제크를 통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지제크를 거친 라캉이 아니라 라캉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저작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어판 출간의 의의를 두고 싶다.

백상현 20세기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구성하기 위해, 라캉이란 20세기의 정점에 선 텍스트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먹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그것을 라캉은 ‘책 먹기’라고 말했다. 이제 우린 라캉을 재발명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즐거운 지옥”이었던 25년 ‘에크리’ 번역

새물결 출판사가 저작권을 보유한 사위 자크 알렝-밀레 등 자크 라캉의 유족과 번역 계약을 맺은 것은 1994년이다. 저작권료는 600달러. 기간은 무제한. 그 뒤로 25년 동안 번역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번역자들은 절망과 용기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어떤 번역자는 상당 부분 번역을 하다가 ‘이건 번역을 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이걸 번역하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번역 원고를 회수해 간 일도 있었다. 그렇게 거쳐간 번역자들이 모두 10명에 이른다. 조형준 새물결 발행인은 “출판사가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기가 그렇더라. 그래서 돈도 많이 잃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번역에 공백이 생긴 부분은 조 발행인이 직접 번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나무 위에서 울면서 떨어지지 않는 묘기를 부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은 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가 없더라. 누군가를 비꼬는 이야기 같은데 라캉이 명확하게 밝히질 않아서 짐작도 되지 않았다. 프랑스인 파리 7대학 교수를 만나서 번역이 막히는 부분을 물어봤는데, 이 친구도 ‘쓰여 있는 건 프랑스어가 맞는데, 의미는 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프랑스인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번역을 하겠나,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마치 허먼 멜빌의 <백경>의 에이허브 선장 같았다. 고래를 잡아서 끌고 온 건지, 고래한테 끌려 간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크리> 번역에 고난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읽다보면 라캉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유를 밀고 나가면서 새로운 사상을 발생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에크리> 번역은 그야말로 즐거운 지옥이었다.”

저작권자 쪽에서 영문판을 제외하곤 역자 주와 해제, 후기를 절대 첨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3년 전에 번역 원고를 유족들에게 보내 검토를 거쳤는데, 이런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어떤 문장은 무려 6가지 뜻으로 해석되기까지 하는 책인데도 이런 것들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어판 번역자도 화가 나서 따로 주석서를 낸다고 하는데, 그 책이 나오면 번역해볼 생각이다.”

그동안 번역비에, 3권 분량의 책을 한 권으로 내느라 책 값이 비싸졌다는 것이 조 발행인의 해명이다. “1판으로 먼저 1천부를 찍었다. 이후에 전공자들의 지적이 있으면 이를 반영해 번역을 고쳐나가려고 한다. 10년간 영문판을 번역한 브루스 핑크가 역자 서문에서 <에크리> 번역을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썼다. 한국어판도 동일하게 진행 중인 작업이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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