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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0대 여성들 거리로…‘정치활동 금기’ 관습을 깨부수다

등록 2019-02-26 05:00

28일 ‘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미래’ 학술대회


임정 헌장에 ‘남녀평등’ 조항 등
“정치 주체로서 여성 표상 확산 계기”

‘청년들이 주도적 참여’ 원인 분석도
총독부 “참가자 절반 30살 이하 청년”

“1918년 독감 14만여명 사망
흉흉한 민심, 3·1운동에 영향” 연구도

학자들 8편의 다양한 논문들 발표
‘3·1운동 100주년 총서’ 출판회도 겸해
1921년 ‘상해대한적십자회’가 발행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한국독립운동)에 실린 만세 시위 장면. 화보집에 실린 사진들은 3·1운동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것이다.
1921년 ‘상해대한적십자회’가 발행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한국독립운동)에 실린 만세 시위 장면. 화보집에 실린 사진들은 3·1운동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축적돼온 연구를 집대성해 3·1운동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하는 학문 토론의 장이 열린다.

한국역사연구회·한국학중앙연구원·한겨레신문사가 공동주최하는 ‘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학술대회가 오는 2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이날 학술대회는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위원장 김정인)가 집필한 <3·1운동 100주년 총서>(전 5권)의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릴 예정이다. 1989년 같은 자리에서 한국역사연구회가 역사문제연구소,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열고 기념논문집 <3·1민족해방운동연구>를 펴낸 지 30년 만에 다시 함께 개최하는 뜻깊은 행사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3·1운동의 배경과 발발에 대한 재조명’과 ‘3·1운동의 심층구조와 사상에 대한 재인식’을 주제로 총서에 포함된 8편의 다양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소현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3·1운동과 정치 주체로서의 여성’에서, 3·1운동이 전 민족적 궐기를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으로만 여성들도 참여했다는 점을 부각하는 민족사적 해석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3·1운동에 여성들이 참여함으로 기존의 젠더 관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3·1운동 이전엔 거리를 다니는 것조차 꺼리던 10대 여성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금기시되던 정치활동을 한 것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깨부수는 일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헌장에 ‘남녀평등’ 조항이 들어가고, 1920년대에 수많은 여성단체가 만들어진 것 또한 3·1운동의 영향이었다. “3·1운동은 여성들이 만세시위 준비부터 거리 시위, 감옥 투쟁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전면에 가담하면서 정치적 주체로서 여성의 표상을 크게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주동빈(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은 신진 연구자답게 3·1운동 당시 경성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청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원인을 분석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참가자의 절반은 30살 이하 청년이었다고 추산했다. 그는 ‘3·1운동 초기 경성 시위에 대한 세대론적 분석’에서, 기숙사·하숙집·교회 등 집합적 생활공간에 모여 살던 ‘재경 학생’들에 주목한다. “집안 환경이 달라도 경제적·정치적 ‘미결정’ 상태의 ‘동년배’ 학생들이 타지의 ‘집합적 생활공간’에서 나누던 사담이 공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재경 학생’들이 초기 시위에서 ‘집합주체’로 나타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당시의 생활사적 맥락을 살피는 일은 ‘1919년’과 ‘2019년’ 사이의 간극을 압축시켜 ‘100년 전 오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백선례(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는 흔히 ‘스페인 독감’이라 알려진 ‘1918년 독감’으로 흉흉해진 민심과 방역에 실패한 조선총독부에 대한 불신이 3·1운동으로 폭발했다고 본다. 1918년 3월부터 1919년 초반까지 전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만주 등을 통해 1918년 여름 조선에 상륙했다. 조선 사람 중 40%가 독감에 전염됐으며 사망자가 14만여명에 이르렀다. 독감이 퍼지며 관공서·학교·공장 등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의약품 품귀 현상이 빚어졌으며 독감으로 온 집안이 전멸하는 비극이 빈번히 일어났다. 인구 규모를 고려할 때 조선의 독감 피해는 환자·사망자 비율 모두 당시 일본, 대만보다 훨씬 높았지만 조선총독부는 안일한 대처로 일관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열악한 위생 상태 탓으로 책임을 미뤘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조선인들이 3·1운동으로 분노를 표출했다는 설명은 2015년 당시 정부의 무능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대처’로 정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3·1운동이 일본 상층부의 권력투쟁에도 영향을 미쳐 식민지 통치 전략에 일으킨 변화에 주목하는 연구도 흥미롭다. 이형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부교수는 ‘1910년대 일본의 식민지 통치구조 개혁과 조선’에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육군 조슈파와 제1당인 입헌정우회의 대립과 타협의 산물이었다”고 요약한다. 조슈파는 식민지를 메이지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특별통치영역으로 둘 것을 주장했다. 반면, 정우회는 일본의 법 제도를 식민지에 시행하는 ‘내지연장주의’를 표방하며 조선총독의 행정권을 일본 내각에 귀속시키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이끌었던 육군 조슈파의 영향력을 감소시켰고, 정우회를 이끄는 하라 총리 내각이 추진하는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김지훈 이주현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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