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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본을 쓰러뜨린 건 ‘원폭’이었나?

등록 2019-02-28 18:42수정 2019-02-28 19:35

일본계 미국인 러시아사 전공 학자
태평양전쟁 마지막 넉달간 진행된
미·소·일 수뇌부 상호작용 분석해
‘일본 항복’의 진정한 원인을 탐구
종전의 설계자들-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메디치·3만3000원

고도로 조직화된 두 인간집단이 상대국에 자신의 ‘국가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벌이는 잔혹한 폭력행위인 전쟁이 왜 시작됐고 어떻게 마무리됐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특히 그 전쟁이 인류에겐 ‘원폭 투하’, 한반도엔 ‘분단’이라는 현재 진행형의 비극을 낳은 태평양전쟁이라면, 이 과정을 이해하고 복기해 보는 것은 한국인에게 하나의 중요한 지적 의무가 된다.

일본계 미국인 하세가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들>은 미국·소련·일본이 뒤엉켜 싸운 이 전쟁의 마지막 4개월을 집중 분석한다. 일본이 항복에 이르게 된 경위와 관련해선 한도 가즈토시의 <일본의 가장 긴 하루> 등 주로 일본인들이 쓴 저작이 쏟아져 나왔다. 이 책들은 “내 몸이야 어찌 되든” 백성을 위해 8월10일과 14일 두 차례 ‘성단’(聖斷)을 내린 일왕의 역할을 강조하는 ‘일본 중심’의 서술이란 한계를 노출해 왔다.

1945년 얄타회담을 위해 모인 윈스턴 처칠(왼쪽부터)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1945년 얄타회담을 위해 모인 윈스턴 처칠(왼쪽부터)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한 저자는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활용해 전쟁 말기 각국 지도부가 어떤 상호과정을 거쳐 결국 역사가 된 ‘지금의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전쟁 말기 세 나라는 서로 융합할 수 없는 각각의 국가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1945년 7월 ‘원폭 개발’이란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크게 출렁인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얼굴을 마주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며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소련의 대일 참전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원폭이라는 ‘마성의 무기’가 개발된 뒤, 후계자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배제한 채 승리의 과실을 독점하려 했고, 서둘러 원폭을 사용해 일본의 조기 항복을 끌어내려 한다.

이에 반해 서부전선에서 나치를 상대로 처절한 승리를 거둔 스탈린은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지정학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시 ‘중립’ 조약을 맺고 있던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이는 ‘조약 파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원폭 개발 뒤 미국의 태도가 변했음을 감지한 스탈린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극동소련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클레멘트 애틀리(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메디치미디어 제공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클레멘트 애틀리(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메디치미디어 제공
절대 수세에 몰렸던 일본의 목표는 단 하나, 천황제란 국체의 변경을 불러올 수 있는 ‘무조건 항복’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적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뒤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에 임한다거나,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의 중재를 통한 화평을 추진했다. 이 ‘암투’의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미국의 2차례에 걸친 원폭 투하, 스탈린의 뻔뻔한 참전, 일왕의 (국체호지(國體護持)를 100% 담보하지 않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황국불멸’의 신화를 믿으며 마지막까지 철저항전을 부르짖은 일본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변수는 원폭이었을까, 소련의 참전이었을까.

저자는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세밀히 분석해 결정적인 변수는 ‘소련의 참전’이었음을 논증한다. 일본 수뇌부가 마지막까지 집착했던 본토 결사항전의 핵심 전제가 ‘소련의 중립’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눈앞에 닥친 커다란 불행보다 지금껏 자신을 가까스로 지탱해 온 ‘자기 확신’이 깨졌을 때 비로소 무너지게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미국은 자신들이 감당해야 했던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원폭 투하가 더 많은 인류를 구했다는 ‘트루먼 신화’ 속으로 의식적으로 도피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백미는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스즈키 간타로 일본 총리의 부주의한 발언을 빌미로 미국의 “원폭 투하 명령이 떨어졌다”고 미국 외교관 유진 두먼이 선선히 인정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저자는 “태평양전쟁의 평가를 둘러싼 해석이 일본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원폭 투하에 대해 사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태평양전쟁이 일본이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었음을 인정하는 (일본 우익의) 주장에 동조하는 셈이 된다”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태도가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미묘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인지 모른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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